한국에서 뮤지컬에 동물이 등장한다고 하면 백이면 백, 어린이용 뮤지컬을 떠올릴 테다. 하지만 고양이가 떼로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오페라의 유령>, <미스 사이공>, <레미제라블>과 함께 세계 4대 뮤지컬로 손꼽히는 뮤지컬이 있다. 바로 <캣츠>다.

T.S 엘리엇의 <지혜로운 고양이가 되기 위한 지침서>의 서사에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숨결이 더해진 <캣츠>에는 다양한 고양이의 사연이 퍼레이드로 나열된다. 모든 고양이들의 정신적 지주인 선지자 고양이 올드 듀터러너미를 비롯하여 반항아 고양이 럼텀터거, 극장 고양이 거스, 부자 고양이 버스토퍼 존스, 마법사 고양이 미스토펠리스 등의 사연이 옴니버스 식으로 무대에서 펼쳐진다.

▲ 사진 박정환
하지만 이들 고양이 무리에 끼지 못하는 암고양이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그리자벨리, 앞에서 열거한 고양이들이 제각기 자신의 이야기를 젤리클 축제 가운데서 털어놓는 동안 그녀는 고양이 무리 젤리클에 끼지 못하고 변두리에서 서성이기만 한다. 젤리클을 떠났다가 다시 젤리클로 돌아왔다면 고향 젤리클이 그리워야 할 텐데 고향에서도 그녀를 반기지 못하니, 그리자벨리는 고향에서조차 대접받지 못하는 아웃사이더의 비애를 보여준다.

젤리클 축제는 일 년에 한 번 열리는 진귀한 페스티벌이라는 목적도 있겠지만 고양이의 천국 헤비사이드 레이어에 누가 들어가는가를 고르는 콘테스트, 경연의 목적도 있다. 젤리클 고양이 무리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그리자벨리가 젤리클 축제의 고양이로 뽑혀 헤비사이드 레이어로 들어간다는 건 암고양이의 고단한 삶을 위무하는 것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철학적으로는 이원론, 혹은 영지주의로 읽어볼 수 있는 장면이기도 하다.

영지주의(그노시즘)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육신은 저열하고 악하지만 영혼은 선하고 위대하다는 관점으로 가진 극단적인 이원론이다. 영지주의의 관점으로 보면 그리자벨리의 고단한 삶은 젤리클 고양이 무리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고단한 육체를 버리고 정신이 쉼을 얻어야 진정한 위로를 얻을 수 있다.

▲ 사진 박정환
영지주의적인 이원론의 관점으로 본다면 그리자벨리가 헤비사이드 레이어에 들어간다는 설정은 고단한 삶을 살았던 암고양이의 죽음을 의미한다. 비록 암고양이의 육체는 죽음으로 소멸하지만 그녀의 정신은 헤비사이드 레이어로 올라감으로 고단한 삶을 위로받을 수 있는 거다.

이번 내한공연 <캣츠>에서는 오리엔탈리즘도 엿볼 수 있다. 극 중 등장하는 극장고양이 거스의 사연 가운데에는 몽골 수병이 등장한다. 알다시피 수병은 해군이다. 한데 옛 몽골군은 육군이지 해군이 주력군이 아니다. 몽골 해군이 약하다는 건, 고려시대에 여몽 연합군이 일본을 정벌하려다가 물고기 밥이 된 우리 역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육군을 주력군으로 하는 몽골군에게 몽골 수병이 위협적으로 묘사되는 거스의 사연은, 오페라 <나비부인>처럼 서양의 시선으로 동양을 재단하는 오리엔탈리즘을 보여주고 있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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