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년만에 추진되고 있는 TV 수신료 인상이 암초에 걸렸다. KBS 이사회와 방송위원회를 거친 수신료 인상안이 국회에 제출된지 한달이 다 되도록 국회 문광위에 상정조차 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은 KBS 정연주 사장이 대선을 앞두고 수신료 인상을 추진하는 것에 여전히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17일부터 시작되는 국정감사 일정과 본격적으로 달아오를 대선 국면을 고려할 때 수신료 인상의 연내 처리가 사실상 물건너 가는게 아니냐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 지난 10월 16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수신료 인상안 국회 상정'을 촉구하는 1인 시위를 하고 있는 KBS 김현석 기자협회장 ⓒ서정은

적법한 절차를 거쳐 국회로 넘어온 수신료 인상안에 딴죽을 걸기 바쁜 한나라당의 태도에 언론계의 비판 여론도 거세다. 전국언론노조 KBS본부와 계열사 노조, 18개 KBS 직능단체 역시 지난 15일부터 TV수신료 인상안의 국회 상정을 촉구하는 1인 시위에 돌입하며 한나라당을 압박하고 있다.

둘째날인 16일 오전, 국회 앞 1인 시위에 나선 KBS 김현석 기자협회장은 "수신료와 KBS 사장 문제를 결부시키는 것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KBS를 길들이겠다는 의도"라며 "흔들림 없는 공정 보도로 정면돌파하겠다"고 말했다.

Mediaus : 수신료 인상안이 한나라당의 비협조로 국회 문광위에 상정되지 못하고 있다.

김현석 : 한나라당의 목적은 딱 하나다. KBS를 이대로 질질 끌고가는 것이다. 결국 KBS의 대선 방송을 지켜보겠다는 것인데, KBS가 한나라당 후보에게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는 것을 막겠다는 정치적 의도다. 공영방송을 살리기 위해 수신료 인상은 반드시 해야 하고 또 회사 차원에서는 그것을 적극 추진해야겠지만 기자들은 여기에 결코 영향을 받아선 안된다. 내부에선 혹시라도 수신료 인상 국면에서 한나라당과 이명박 후보에 대한 비판을 자제하는 게 좋겠다는 분위기가 형성될까 우려하고 있다. 기자들은 수신료 문제에 영향받지 말고 제대로 된 공정보도를 하자는 이야기들을 많이 한다.

M : 수신료 문제를 KBS 정연주 사장과 연계하는 한나라당의 논리를 어떻게 보나.

: KBS의 정치적 독립은 정말 중요한 사안이다. 그런데 한나라당이 수신료 문제를 놓고 사장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 그러니까 원하는 사람을 KBS 사장으로 앉히겠다는 불순한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나 마찬가지다.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KBS 내부는 보도의 독립과 제작자율성이 이뤄져 있다. 그런데도 수신료와 사장 문제를 결부시키는 것은 정치색이 깔려있는 것으로 밖에 해석할 수 없다. 정권이 바뀌었을 때, 수신료 인상의 대가로 KBS 사장이 좌지우지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우려할 만한 상황 아닌가. 영국의 BBC가 물가연동제로 수신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수신료를 인상할 때마다 정치권의 눈치를 볼 필요 없게 만들고, 공영방송을 장악하려는 시도를 막기 위해서다.

M : KBS에서는 홍두표 사장이나 박권상 사장이 정권과 임기를 같이 했다. 이런 전례가 있다보니 올해 대선을 앞두고 수신료와 KBS 사장 문제를 결부시키는 말들이 더 나올 수도 있다.

: 수신료 인상 중요하다. 그렇지만 정권과 KBS 사장이 운명을 함께 하는 상황에서 탈피하는 것이 더 큰 개혁이라고 본다. 특정 정파가 원하는 사람으로 KBS 사장을 바꾸는 것은 말이 안된다. 그렇게 해서 수신료를 올린다면 차라리 올리지 않는 게 낫다. 수신료와 관련해 KBS가 국회와 정치권의 눈치를 더이상 보지 않아도 되는 사회적 환경과 조건을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

M : 수신료 인상이 왜 필요하냐는 질문을 많이 받을 것 같다.

: KBS 2TV <인간극장>의 예를 많이 든다. 시청률이 10% 안팎으로 잘 나오는데 광고가 안 붙는다. 장수프로그램이고 시청률도 잘 나오는데 광고가 없는 이유는 뭘까? <인간극장>은 소외계층이나 나이 든 분들이 많이 보는 프로그램이다. 다시 말해 소비력이 없는 사람들이 보는 프로그램, 한마디로 광고주에게 매력이 없다는 소리다. 광고 비중이 전체 재원의 70%를 차지하는 현 구조가 계속된다면 <인간극장>처럼 좋은 프로그램, 소수자를 위한 프로그램은 사라질 수 밖에 없다. 방송사가 살아남기 위해 광고에 매달리면 광고가 붙는 프로그램만 제작할텐데 과연 이것이 옳은 일인가? 소외계층, 소수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것이 공영방송 KBS가 해야 할 역할이다. 수신료 2500원의 가치가 과연 무엇인지를 국민들이 잘 판단해줘야 한다.

▲ ⓒ서정은

M : 올해 대선과 내년 총선을 앞두고 공정보도의 책임이 막중한데 어떤 부분에 방점을 찍고 있나.

: 지금까지의 정치보도는 공방에 대한 중계식 보도와 동정보도가 주를 이뤘다. 그래서 이번엔 좀 바꿔보자는 것이 KBS 기자들의 생각이고 의지다. 어느 후보가 당선되느냐에 따라 국민 생활이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면밀하게 검증하고 비교해 국민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자는 것이다. 정책과 공약, 자질에 대한 검증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기획안을 만들어 회사에 요청했고 최근 이를 위해 9명의 기자들로 검증팀을 꾸렸다.

M : 선거 때마다 방송뉴스는 정치권의 편파 시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기계적 균형도 항상 논란이 되는 의제인데.

: 기계적 균형도 중요하지만 국민이 합리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야말로 공영방송의 역할이다. 그동안 워낙 안팎의 정치 공세와 비난이 높았고 그러다보니 편파성 시비를 피하기 위해 중계식 보도와 균형 보도에 치우친 면도 없지 않다. 올해는 다르게 보도할 것이다.

M : 수신료 문제와 관련해 특히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비판이 많았고 KBS에서도 소송을 거는 등 강경한 대응을 보였는데.

: 기획 단계에서는 A라는 사안에 대해 B의 측면에서 비판할 생각이었지만 막상 취재를 해보면 이야기가 안된다거나 다른 측면을 알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우리 언론은 몰아가기 관행, 일단 시작했으면 비판하고 보자는 식의 관행이 남아있다. 그런 측면에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여전히 사주의 방침에 따라 흔들리는 것 같다. 조선과 동아의 기자들도 KBS 수신료 문제를 취재하면서 자신들의 주장이 억지스럽다는 것을 알텐데 그럴 수 밖에 없는 그들이 불쌍하다.

M : 수신료 인상이 추진되면서 KBS의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다.

: KBS 개혁의 방향이자 목적은 정치적 공정성을 잃지 않는 것, 그리고 공영방송을 보면서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콘텐츠를 얻게 하는 것, 그래서 공영방송이 필요하다는 것을 국민들이 느끼게 하는 것이다.

수신료 인상을 반대하는 쪽에서는 KBS의 인력과다를 지적하며 구조조정 이야기를 하는데 핵심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말 문제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존재하는 이중구조다. 정규직 인력이 한정돼 있기 때문에 비정규직 문제를 풀어나가기가 어렵고, 회사가 어려워지면 1차적으로 타격을 받는 사람들이 비정규직이다. 같은 일을 해도 누구는 정규직이기 때문에 안정된 생활과 여러가지 특혜를 받고, 누구는 비정규직이기 때문에 고용불안과 차별을 받는다. 이런 현실을 고민해야 할 때다.

M : 취재지원 선진화 방안으로 정부와 기자단의 갈등이 첨예한데.

: 정부가 우선 반성해야 할 대목이 있다고 본다. 통합브리핑룸 이전에 기자들이 반발하면서 며칠째 브리핑을 거부하고 있는데 이 때문에 정보를 놓치고 국민이 알아야 할 내용을 보도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걱정이 많았다. 그런데 브리핑을 듣지 않아도 아무 문제가 없다. 브리핑이 부실하기 때문이다. 정부 홍보자료를 그대로 읽는 브리핑, 질문을 해도 자료에 있는 것만 대답하고 정보를 숨기는 지금의 방식으로는 내실있는 취재, 국민의 알권리를 충족할 수 없다. 기자단이 브리핑을 거부해도 아무 문제가 없는 '맹탕 브리핑'을 정부가 반성부터 해야한다는 소리다. 브리핑 내실화, 원활한 정보공개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기자들을 각 부처 공무원과 떨어뜨려놓는 지금의 방식은 문제가 있다. 기자단의 문제도 바로잡혀야 하지만 언론을 대하는 정부의 태도부터 선진화돼야 한다. 취재지원 선진화가 무엇인가. 브리핑을 실속있게 하고 정보 공개를 잘해서 국민에게 제대로 알리는 것 아닌가.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