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이 공개 연애를 한다는 사실이 무척 비상식적으로 느껴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성일은 엄앵란을 향해 월담을 하고 미녀 가수 조갑경은 깜찍하게 열애설을 거부했었지요. 어르신 연애도 이 정도니 아이돌의 사귐이야 오죽했을까요.
간미연은 시대를 풍미하던 핫 아이돌과 열애설이 나돌았다는 이유로 눈을 파낸 사진과 면도날을 받았고, 박지윤은 덜덜 떨며 강타와의 열애설을 부정해야만 했습니다. 지금도 저는 그 당당하던 박지윤이 강타 팬의 눈치를 보며 몸을 사리던 인터뷰를 잊지 못해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니 연예인도 사람인데 인간의 가장 가슴 벅찬 순간을 제압하는 것도 차마 못할 짓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뭐 이제는 연애를 한다고 해도 그래, 사랑을 해야 러브송도 부르고 사랑하는 연기도 하겠다 싶어서. 사랑 한번 못 해본 사람의 키싱유 베이베가 와 닿을 리가 있나요.
그럼에도 진짜 아무렇지 않은 팬은 없을 겁니다. 아무리 21세기가 되고 팬 문화 또한 쿨-해졌다지만 범람하는 아이돌의 공개 연애 속에서 한 무리의 누군가는 눈물짓고 있을 테죠. 촌스럽다고 힐난하지는 마세요. 결국, 그 촌스러운 마인드가 아이돌의 인기를 이끈 원동력이었을 테니까.
6월 19일, 엑소의 백현과 소녀시대의 태연이 목하열애 중이라는 전갈이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를 뒤덮었습니다. 인기 많은 아이돌 그룹 엑소의 그렇지 않아도 팬덤 1위라는 백현과 소녀시대의 리더로서 마니아층이 두꺼운 태연의 만남은 기존 아이돌의 열애설보다 더 뜨거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중이 놀란 것은 인기 아이돌의 만남이었지만 팬이 놀란 것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그들의 연애가 기정사실화 된 것. 그게 루머나 추측이 아닐 만큼 두 사람이 자신들의 연애를 감추려고 애써주지 않았다는 절망감이었습니다.
요즘은 사생팬이라는 무리가 따로 있을 만큼 아이돌의 무대 밖 생활 면면을 집요하게 파헤쳐놓은 정보들이 수두룩합니다. 그래서 예전만큼 열애 사실을 감추기가 어렵지요. 태연과 백현의 열애가 이미 한 무리의 팬에게는 새삼스레 신기한 이슈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티 나게 서로를 챙기는 두 사람의 모습이 공중파에서 노출된 적도 있고, SNS를 통한 두 사람만의 밀어가 팬을 상념에 빠뜨렸던 에피소드 또한 수차례였으니까요.
그밖에 팬들이 적극적으로 제시한 증거를 살펴보면 비슷한 포즈로 찍은 컨셉 사진이나 태연의 시 같은 혼잣말을 백현이 반응해 본인의 SNS 프로필 사진으로 집어넣거나 본인의 이름, 그리고 그룹명으로 조합한 맞춤형 인스타그램 아이디. 엑소의 멤버 세훈이 공개한 백현의 생일 케이크에서 장식품인 오레오를 구도마저 맞추어 올린 태연. 의심이 정황을 불러냈는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인지를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너무나도 시시콜콜한 원성이죠.
사실 아이돌의 공개 연애에 대한 반응이 이전 같지 않은 요즘엔 그룹마다 연애 중인 아이돌 한둘쯤은 끼어있기 마련입니다. 대중의 호감과 비호감이 엇갈렸을 뿐 팬의 반응은 비슷했죠. 절망스럽지만 딱히 원망할 사유는 못 되는. 그럼에도 백현과 태연을 향한 팬들의 반응이 유독 폭발적인 건 연애 중이라는 사실 자체보다 팬을 비밀 연애의 인간 장애물로 사용했다는 괘씸함 때문입니다.
백현과 태연이 밀어를 나눈 현장. 그곳은 모두 팬서비스를 위해 만들어진, 팬과 그들만의 밀접한 소통이 오가는 SNS와 팬 게시판이었습니다. 심지어 태연은 반응이 퍽 좋은 인스타그램의 개설 이유를 팬 때문이라고 고백하기도 했고요. 소녀시대의 활동이 잠잠할 때 답답해할 팬을 위로하기 위해서라고. 순전히 태연의 활동을 팬에게 알리고자 만들어둔 인스타그램에서 팬이 가장 상처받을 이야기를 수수께끼의 밀어로 만들어 속삭였다는 배신감은 제삼자는 쉽사리 이해하지 못해도 누군가를 좋아해 봤던 팬이라면 충분히 와 닿을 만한 서러움입니다.
그러나 이 사과문마저도 상처 입은 팬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는 돌파구가 되진 못한 것 같습니다. 아이돌끼리의 연애, 금단의 사귐인 그들의 사랑을 팬 서비스 공간에서 비밀의 언어로 주고받으며 스릴과 재미를 즐긴 것이 아닌가 하는 배신감 때문에. 그들만의 시시콜콜한 연애. 어쩜 여기에 딴죽을 거는 팬의 심리가 누군가에겐 치졸하고 참 쿨하지 못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팬을 무너뜨린 건 그들이 연애 중이라서가 아니라 팬의 상처를 배려해줄 가치조차 염두에 두지 않은 아이돌의 무정함입니다. 문득 유영석이 작사·작곡한 ‘더 팬’의 연예인이라는 노랫말이 떠오르는 하루군요. “알고 있나요. 그댄 너무 멀리 있어 내가 쉽게 다가갈 수 없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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