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다. 어려움이 없다. 일, 사랑, 배신, 복수 모두 별다른 어려움 없이 쉽게 달성한다. 그런 만큼 구태의연하고 시대착오적이다. 물론 현실이 아닌 드라마 이야기이다. 조선업 세계 1위의 현실을 배경으로 청춘남녀의 사랑과 야망을 그려나가고 있는 MBC 주말특별기획드라마 <내 여자>(이희우·최성실 극본, 이관희 연출)가 애초의 기대와 달리 시청자의 호응을 얻지 못한 채 잠수함처럼 수면 아래에 머물러 있다. 사랑과 배신, 그리고 복수를 시대 상황에 맞게 풀어내면서 1990년대 시청자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드라마 <폭풍의 계절>과 <아들의 여자> 등에서 호흡을 맞췄던 작가와 연출이 오랜만에 내놓는 작품이기 때문에 <내 여자>에 대한 기대감은 매우 높았다.

하지만 사랑에서 배신으로 이어지는 드라마의 도입부는 이 같은 기대감을 떨어뜨리기에 충분할 정도로 실망스러웠다. 한마디로 말해 <내 여자>는 ‘주말특별기획드라마’라는 수식어가 부끄러울 만큼 구태의연하고 시대착오적인 사랑과 야망에 빠져 2000년대 시청자의 공감을 얻는 데 실패한 드라마 할 수 있다. 동시간대 방송되는 다른 프로그램을 탓하기도 민망하다. 1980년대 방영되었던 드라마 <종점>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지만 1980년대와 2000년대의 정서가 다른 만큼 분명히 새롭게 재해석하겠다는 작가의 말이 무색할 정도로 <내 여자>는 구태의연하고 시대착오적이다.

▲ MBC 주말특별기획드라마 <내 여자>.
<내 여자>는 유능한 선박설계사 ‘김현민(고주원 분)’과 그의 연인 ‘윤세라(박솔미 분)’, 그리고 이들 사이에 끼어든 재벌가의 남매 ‘장태성(박정철 분)’과 ‘장태희(최여진 분)’의 사랑과 야망에 관한 이야기이다. 김현민은 유능한 선장이었지만 불의의 사고로 선원들을 모두 살리고 바다 위에서 죽어간 아버지를 위해 안전한 배를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감이 강한 선박설계사이다. 그리고 그의 연인 윤세라는 외교관이었던 부모를 어려서 잃고 어머니 친구인 김현민 어머니의 보살핌 속에 악착같이 공부해서 동진조선에 입사한 재원이다. 뛰어난 외국어 실력으로 장태성 전무 비서로 발탁되었다가 사랑과 야망 사이에서 갈등한다.

장태성은 동진그룹의 후계자이면서 동진조선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는 전무이다. 재벌가의 자식은 그러 해야 한다는 것처럼 사랑을 믿지 않는 인물로 사람을 깊이 만나지 않다가 자신의 비서로 일하던 윤세라와 인생 게임을 하면서 변화한다. 장태희는 정략결혼의 희생양으로 결혼 6개월 만에 이혼하고 친정으로 돌아와 동진그룹 경영에 뛰어드는 인물이다. 독선적인 아버지의 권위에 힘들어하다가 인간적인 면모가 돋보이는 김현민의 매력에 빠져들어 적극적으로 구애한다. 그리고 ‘홍민예(추상미 분)’는 막대한 현금을 무기로 부실기업을 인수하여 리모델링한 뒤 되파는 방식으로 자본을 축적한 지하금융계의 거물로 윤세라에게 배신당한 김현민을 도와주는 미스터리한 여인이다.

등장인물 구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내 여자>에서 ‘여자’는 ‘선박’을 빗대는 단어임과 동시에 실제 사랑하는 ‘여자’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드라마의 제목만으로 본다면 <내 여자>는 선박과 한 여자에게 미친 집념의 두 남자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강렬한 남성적 에너지가 넘치는 ‘조선소’와 ‘선박업’을 둘러싼 청춘남녀의 사랑과 신분상승 욕망, 배신과 분노 그리고 복수의 장대한 서사시는 소재와 규모 면에서 얄팍한 웃음이나 감상적인 눈물로 무장한 최근의 드라마와 비교해서 결코 뒤떨어지지 않을 만큼 흥미로운 이야기이다.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조선업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청춘남녀의 운명적인 사랑 이야기는 그 소재가 아무리 진부하다 할지라도 시청자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흥미진진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배신과 복수까지 곁들여져 있으니 시청률 측면에서는 그야말로 금상첨화 아닌가?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내 여자>는 수면 위로 떠올라 유려한 모습으로 항해하기는커녕 잠수함처럼 수면 아래에서 움직일 줄 모른다. 원인은 분명하다. 세계 1위를 지키기 위한 대한민국 조선업계의 치열한 생존 경쟁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 채 1970년대 <청춘의 덫>의 ‘강동우(이정길 분)’가 환생이라도 한 것처럼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 상류층으로 진입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한 여자 윤세라의 몸부림이 시청자의 공감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지고지순하게 자신을 사랑해주는 남자 김현민까지 자신의 야망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상황에서 윤세라는 장태희로부터 ‘정신병자’라는 소리까지 듣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감하기 어려운 캐릭터의 빈틈이 메워지는 것은 아니다.

▲ MBC 주말특별기획드라마 <내 여자>.
원작 <종점>이 메리야스회사를 배경으로 청춘남녀의 사랑과 배신 그리고 복수와 파멸을 다뤘다면 <내 여자>는 극중 배경을 선박회사로 바꾸고 파멸보다는 사랑과 배신을 극복한 성공 스토리에 집중하겠다는 기획 의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가진 것 없어도 명석한 두뇌와 재능만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1980년대와 달리 2000년대는 아무리 뛰어나도 결국 자본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재해석은 2000년대 시청자의 공감을 얻을 수 없다. <내 여자>는 30여 년 만에 성공 스토리의 골격이 변한 한국사회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탓에 재미도 감동도 모두 놓친 것이다.

이런 상황은 등장인물의 성격을 제대로 잡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했다. 특히 주요 사건과 갈등의 핵심에 위치한 윤세라가 전혀 매력적이지 않은 것이 결정적이다. 드라마 도입부에서 동진조선에 갓 입사하여 연수를 받던 윤세라는 기획실장 자신의 연인이자 선박설계사인 김현민과 영업기획실장 장태희의 관계를 의심하면서 불안해한다. 사건 전개 과정에서 충분히 필요한 장면이지만, 이 같은 모습을 2회 연속 보여주는 것은 윤세라를 이상 성격의 인물로 오해하게 만들 뿐이다. 그리고 윤세라가 자신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장태희에게 맞서는 상황도 뛰어난 실력을 보유한 재원이어야 할 윤세라 캐릭터에 균열을 일으킬 정도로 비현실적이다. 등장인물의 성격을 제시해야 할 드라마의 도입부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서 시청자들은 등장인물들을 비현실적으로 느끼게 된 것이고 이로 인해 드라마에 몰입할 수 있는 동력을 확보하지 못한 것이다.

이처럼 <내 여자>의 주요 등장인물들은 모두 ‘~척’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짜증스러움을 유발하면서 드라마의 핵심적인 사건들을 힘 있게 끌어가지 못하는 한계에 직면한다. ‘순수한 척, 진지한 척’하는 김현민과 ‘예쁜 척, 가여운 척’하는 윤세라, 그리고 ‘터프한 척, 멋진 척’하는 장태성과 ‘도도한 척, 연약한 척’하는 장태희에게는 조선업을 둘러싼 사랑과 야망, 배신과 복수의 장대한 서사시를 끌어갈 힘이 없는 것이다. 김현민을 배신하고 장태성과 결혼해서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겠다고 결심한 윤세라가 스페인어 번역 일 때문에 동진그룹 회장에게 불려갔다가 미국의 명문가 케네디 집안에 대해 일장연설을 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이 장면은 윤세라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으며 앞으로 어떤 행동을 하게 될지 보여주기 위해 설정된 상황인 것은 미루어 짐작이 가능하나 설득력을 갖지 못함으로써 억지스러운 서사 전개의 한 단면을 노출했을 뿐이다.

드라마의 기본기는 개성 있는 등장인물들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갈등을 행동으로 직접 제시하면서 시청자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내 여자>는 성격은 없이 역할만 주어진 등장인물들의 틀에 박힌 행동으로 방영 초기부터 시청자와의 공감대 형성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폭풍의 계절>과 <아들의 여자>에서 보여주었던 극작과 연출의 관록을 되살릴 시간은 아직 충분하다.

이제부터라도 드라마의 기본기로 돌아가서 등장인물의 성격을 다듬고 그에 따라 사건을 전개한다면 시청자의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못 가진 자와 가진 자의 대립구도에서 출발한 <내 여자>가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점점 더 심화되는 2000년대 한국사회의 병폐를 드러내고 그것을 해소할 수 있는 방안까지 제시해야만 한다. ‘발단’을 지나 ‘전개’로 나아가는 앞으로의 상황만 잘 풀어나가도 <내 여자>의 항해는 순조로울 수 있을 것이다. ‘최성실·이관희’의 환상적인 호흡을 기대한다.

윤석진 교수는 2000년 여름 한양대에서 <1960년대 멜로드라마 연구-연극·방송극·영화를 중심으로>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2004년 가을 <시사저널>에 '캔디렐라 따라 웃고 웃는다'를 발표하면서 드라마평론 활동을 시작했다. <김삼순과 장준혁의 드라마공방전> <한국 멜로드라마의 근대적 상상력> <한국 대중서사, 그 끊임없는 유혹> 등의 저서와 <디지털 시대, 스토리텔러로서의 TV드라마 시론> <극작가 한운사의 방송극 연구> 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 현재 충남대 국문과에서 드라마 관련 전공 과목을 강의하면서 한국 드라마의 영상미학적 특징에 대해 연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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