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tvN의 드라마들은 제목도 제목이지만, 제목을 설명하는 부제가 벌써 호기심을 자극하고 들어간다. 예를 들면 <꽃할배 수사대>는 판타지 코믹 수사물에 회춘 느와르라는 부제가 붙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판타지 코믹에 회춘 느와르라는 단어 뜻은 차치하고, 일단은 그게 무얼까 한번 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6월 16일 첫 선을 보인 <고교처세왕>도 마찬가지다. 가장 순수할 혹은 순수할 수밖에 없는 미성년의 고등학생과, 사회의 때묻음을 상징하는 단어인 '처세'를 '콜라보레이션'한 제목은 물론이거니와 코믹오피스활극이란 부제는 더더욱 이 드라마의 정체가 무얼까 관심을 가지게 만든다. 우리가 웹툰 등을 통해 들었던 '왕'이란 제목도 그렇고 이제는 쓰지 않는 '활극'이란 단어를 장르적 설정으로 가져다 쓴 것부터, <고교처세왕>이 빚지고 들어가는 건 '만화적 상상력'이다.

<고교처세왕>은 시작하자마자 헬리콥터가 날아오고, 이른바 '간지'나게 서인국이 등장한다. 그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그가 싱가폴에서 어려운 거래를 성사했다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장면이 바뀌어 엘리베이터에 탄 서인국이 급하게 와이셔츠 단추를 풀고, 그 옆에서 비서로 보이는 이하나가 오늘 시험 시간표를 허겁지겁 일러준다. 다음 장면에선 교복을 입은 서인국이 학교를 향해 뛰고, 이하나는 그런 서인국의 서류 가방을 품에 안은 채 필통이 빠져 있다고 소리친다. 이미 이 씬 하나로 <고교처세왕>의 모든 설정은 정리된다. 1회의 나머지 시간들은, 첫 씬의 그 설정에 대한 부가 설명일 뿐이다.

고등학생인 이민석이 대기업의 간부가 된다는 설정에서부터 '만화적 상상력'을 동원한 드라마는 1회 내내 모든 드라마적 설정에서 그 상상력을 연장시킬 것을 요구한다. 무려 8년이나 차이가 나는 이민석의 형이 쌍둥이가 아닌데도 사람들이 보고 착각할 만큼 이민석과 흡사하다는 것에서부터, 그렇게 9년이나 차이가 나는 형제가 하루아침에 부모님을 잃고 그 형제를 최창호(오광록 분)는 당연하다는 듯이 자식처럼 키우고, 그런 상황에서 형은 하나뿐인 동생을 두고 8년이나 외국에 나가 공부를 한다. 그런데 대기업에 스카우트 돼서 돌아온다던 형이 사라지고, 사라진 형은 동생에게 은밀하게 전화해 자기 대신 회사원이 되어 출근해줄 것을 요구한다. 갈등하던 동생은 경기를 나가는 대신 회사를 향해 뛰어간다.

1회 내용은 따지고 보면 그 어느 것 하나 말이 되는 것이 없다. 제 아무리 하키부라지만 하루 종일 심지어 때로는 야간자율학습까지 학교에 잡혀 있어야 하는 고등학생이 이중생활을 한다는 것도, 제 아무리 시늉이라지만 고등학생이 회사원이 된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아니 애초 9년이나 차이 나는 형제가 남들이 못 알아볼 만큼 똑같다는 것부터가 문제다. 하지만, <고교처세왕>은 우리가 만화책의 첫 장을 여는 순간 만화가 풀어내는 황당무계한 상상력에 동조할 선서를 한 듯 여기는 것처럼, <고교처세왕>도 애초 고등학생이 처세를 잘한다는 드라마를 보겠다고 마음먹은 한에서 세부적인 황당함 정도는 당연한 것 아니겠냐고 반문하는 듯하다.

그렇게 기본적인 이야기에 더더욱 만화적 판타지를 불어넣는 것은 여주인공인 이하나이다. 남자 주인공, 즉 9살 많은 형의 역할을 하는 이민석 역의 서인국은 우리에게 <응답하라 1997>을 통해 익숙해진, 시크한 듯 멋진 고등학생의 모습을 충실히 재현한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멋진 고등학생 옆에는 응당 있어야 할 것 같은, 자칭 그의 마눌이라며 스토커처럼 그를 따라다니는 여학생 정유아(이열음 분)가 있다. 물론 이민석의 설정 자체가 판타지이고, 그런 그를 따라붙는 여학생이 그런 판타지를 배가시키기는 하지만, 그건 고등학생이 나온 드라마와 만화를 통해 지긋지긋하게 보아왔던, 우리에게 신선하지도 새롭지도 않은 것들이다.

하지만 이하나가 정수영으로 등장한 순간, <고교처세왕>은 어디선가 보았던 익숙한 드라마에서 매우 신선하고 독특한 드라마로 재탄생된다. 무려 5년 만에 텔레비전을 통해 시청자와 만난다는 사실이 무색하게, 이하나는 고지식하고 어리바리한 계약직 2년차의 정수영을 만화에서 톡 튀어나온 듯한 캐릭터로 탄생시킨다.

커다란 안경, 유행을 무시하거나 아니 애초에 유행이란 단어랑 인연이 없는 듯한 스타일의 옷차림, '페로몬' 운운하며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대뜸 본부장에게 고백해버리고, 거절당하자 실연의 상처에 술에 취해 노숙하는 정수영은 만화나 로맨틱 코미디에서 낯선 캐릭터가 아니다. 그것이 지나치면 눈살이 찌푸려지는 진상 캐릭터를 이하나는 거의 원맨쇼에 가까운 연기로 캐릭터의 공허함을 메꿔나간다. 우리가 <연애시대>와 <메리대구 공방전> 등을 통해 환호했던 황당한 듯하면서도 묘하게 진실한 호소력이 있는 매력을 아낌없이 발휘한다. 덕분에 흔들리는 화면에 정체를 알 길 없는 아니 정체가 뻔해보이던 드라마는, 이하나가 등장하면서 독특한 분위기의 코믹 활극으로서의 기대를 불러일으킨다.

이렇게 첫 회에 주인공의 '원맨쇼'를 통해 시청자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어느새 tvN 월화 드라마의 전통이 되어가고 있는 듯하다. <고교처세왕>의 전작 <마녀의 연애> 첫 회를 채운 것은, 무려 고등학생 교복까지 입고 기자로 고군분투하다 집에 들어와서는 숏팬츠를 입고 화려한 율동까지 선보이며 반지연이란 인물을 설득해냈던 엄정화의 활약이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그에 앞선 <로맨스가 필요해 3>에서는 찐한 연애에서 실연까지 적나라한 연애사를 열연한 김소연의 연기가 있었다.

이는 tvN의 월화 드라마가 젊은 여성들의 로망을 반영하는 로맨틱 코미디 혹은 멜로의 장르로 이어지고, 그 장르의 목적은 그녀들의 로망의 완성이되 그 성공은 드라마를 책임지는 여성 캐릭터의 설득력 있는 안착이라는 데 있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tvN 월화드라마의 전통에 따라, <고교처세왕> 정수영 역할의 이하나는 찌질하지만 정감 가는 2년차 계약직의 캐릭터를 살려내고, 그것은 곧 황당무계하면서도 뻔한 <고교처세왕>의 다음 회를 기약하도록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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