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브이포벤데타>(V For Vendetta)를 아는가?

<매트릭스>의 워쇼스키 형제가 만든 브이포벤데타는 제3차 세계대전 이후 완벽한 통제사회가 된 영국을 무대로 설정한 가상현실 영화다. 'V'라는 이니셜로 알려진 가면 속의 남성은 통제사회의 억압 현실을 하나하나 드러낸다. 마침내 침묵 속에 있던 모든 시민들이 'V'가 되어 거리로 나가고, 수많은 'V'가 거리를 완전히 점유하고, 결국 진정한 시민권을 회복한다. 엔딩신에서 가면을 벗어던지는 그들은, 그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다.

2008년 9월, 대한민국에도 수많은 'V'들이 등장했다. 'V'는 '낙하산 사장 출근 저지 투쟁' 중인 YTN 사내게시판에 "나도 징계하라"라는 실명의 글로, 다음 아고라에선 '권태로운 창'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다.

▲ 지난 1일 조합원 비상총회에 참석한 YTN 노조원들이 ‘공정방송’을 외치고 있다. ⓒ송선영
YTN은 지난 1일, 보도국 사원 인사를 단행했다. 전국언론노동조합 YTN지부(지부장 노종면)는 이를 '징계성 인사'로 판단했고, 이에 회사 쪽에서 작성한 징계 대상자 76명과 고소 대상자 6명의 명단을 공개했다.

그리고 이틀 뒤인, 지난 3일. YTN 사내게시판에는 징계 고소 명단에 포함되지 않은 노조원들의 "나도 징계하라"는 자발적 글이 잇달아 올라오기 시작했다.

"인사팀에서 보내 온 '엄중 경고' 메일 성실히 읽어봤습니다. 사규에 따라 처벌해 주십시오. 달게 받겠습니다. 구본홍 씨 저지 집회 과정에서 사측이 '채증' 등에 의거해 올린 징계 명단에도 제 이름 꼭 넣어 주십시오. 부득이한 사정으로 몇 차례를 제외하고는 열심히 참석했는데, 왜 징계 대상 명단에 빠져 있는지 잘 납득되지 않습니다." (사회1부 김 아무개)

"그들만 처벌하면 항복할 것으로 생각했나요? 제 이름이 명단에 빠진 것에 대해서는 일단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런 혜택(?) 사양하겠습니다. 같은 편이 아니니 저도 잡아가세요. 명석한 분들께서 혹시 실수로 빠뜨린 것은 아니겠죠? 나름대로 채증을 하셨다면 잘 살펴보세요. 저 역시 많은 노조원들과 더불어 주주총회를 저지하려 했고 사장실을 점거한 채 구호도 외쳤으니 말이죠." (국제부 신 아무개)

회사 쪽이 작성한 76명의 징계대상자 명단과 6명의 고소대상자 명단에 자신을 넣어달라는 YTN노조원들. '징계'와 '고소'라는 회사 쪽 행위에 반발하며 YTN에 등장한 수많은 'V'들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

영화에선, 침묵 속에 있던 모든 시민들이 'V'가 되어 거리로 나간 뒤 결국 '진정한 시민권'을 회복했다. 낙하산 사장에 반대하며 일어난, YTN의 'V'들이 지금보다 더 많아진다면, 그땐 그들이 진정 원하는 '공정방송'을 보장받을 수 있을까.

YTN뿐만이 아니다. 다음 아고라에서도 '권태로운 창'이라는 이름의 수많은 'V'가 등장했다.

서울지방경찰청은 지난 1일, '권태로운 창' 아이디를 사용하는 나 아무개(48세)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나씨는 다음 아고라에 촛불집회 장소와 일시 등을 담은 글을 올리고 경찰에 돌을 던졌다는 혐의(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를 받고 있다.

지난 2일, 다음 아고라에는 '권태로운 창'이란 아이디로 다음과 같은 글이 올라왔다.

"지금 경찰청 사이버수사대에선 권태로운창이 워낙 많으니 대체 무슨 영문이냐며 저에게 반문합니다. 아이디가 죄다 비슷하니 매우 헷갈려 하는군요. 저 하나만 잡으면 아고라에 더이상 집회공지가 안올라 올 줄 생각했답니다. 이들의 어리석음에 왠지 웃음이 나는군요. 국민들은 당신들이 생각해왔던 겁쟁이가 아니라고 한 마디 해주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아봅니다."

▲ 다음 아고라에 '권태로운 창' 아이디로 올라온 글들.
나씨에게 구속영장이 청구된 직후, 네티즌들은 경찰에 항의하는 의미로 다음 아고라에 너도 나도 '권태로운 창'이란 아이디로 글을 올리고 있다.

'권태로운 창' 아이디를 사용하는 사람만 없어지면, 다음 아고라에서 자연스레 촛불집회 관련 글이 수그러들 것이라고 생각한 경찰청 사이버수사대. 그리고 이를 비웃듯 새로이 등장한 또 다른 '권태로운 창'

경찰 채증 카메라 앞에서 손으로 V자를 그리며 '얼짱 각도로 부탁해'라고 외치는 시민들에게, 경찰의 물대포 앞에서 '온수'와 '비누'를 외치는 시민들에게 이 같은 경찰의 행동은 어떻게 비쳤을까?

이미 지난 7월, 검찰의 조중동 광고 불매 운동 수사에 항의하며, 대검찰청 홈페이지에 "자수한다. 나도 잡아가라" "나도 구속하라"는 글을 올렸던 과거(?)가 있는 네티즌들의 눈에 경찰의 행동은 조롱거리로 전락했음이 분명하다.

▲ 영화 '브이 포 벤데타' 엔딩 캡처.
오늘도 YTN 사내게시판에는 노조원들의 "나도 징계하라"는 징계 동참 실명 글이 올라왔다고 한다.

2008년 대한민국, 얼마나 더 많은 'V'가 등장해야 할까? 억압된 현실과 통제에 항의하는 대한민국의 'V'가 앞으로 얼마나 더 등장해야 지금의 아이러니한 상황이 멈춰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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