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 속 루시는 ‘날개 없는 천사’처럼 착하기 이를 데 없는 여자다. 잘 알지도 못하는 미래의 남편 찰스 다네이가 불쌍해서 손수건을 적시고, 그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법정에서 증언까지 하는 착한 여자이다.

이번에 루시를 연기하는 김아선은 180도 다른 연기를 선보인다. 밀라디처럼 센 캐릭터를 연기하다가 ‘천상 여자’ 루시를 연기하니 말이다. 아니, 어쩌면 밀라디를 연기하기 전의 청순가련 캐릭터인 콘스탄스 스타일로 다시 돌아갔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고스트> 김우형의 누나이기도 한 김아선을 만나보았다.

- <삼총사>의 밀라디처럼 센 역할을 맡다가 이번에는 <미스 사이공>에서 KIM을 맡았을 때처럼 <두 도시 이야기>에서는 루시 역으로 청순가련형의 연기를 펼쳐야 한다.

“이 역할을 해도 되나? 하는 주저함이 있기는 했다. 막상 연습을 해 보니 제대로 된 옷을 입었다는 느낌이 든다. 루시 같은 청순가련형의 배역이 삼십 대의 마지막 역할이라는 생각이 든다. 최대한 배역을 즐기면서 연습하고 있다.”

▲ 배우 김아선
- 루시는 찰스 다네이가 생판 모르는 남이었을 때도 그를 위해 울 줄 아는 착한 여자다.

“루시는 찰스 다네이와 결혼하기 전까지 둘만의 추억이 많지 않다. 찰스 다네이와 썸씽이 별로 없음에도 루시는 찰스 다네이를 향해 울어줄 수 있고, 법정에서 증언해줄 수 있다. 루시를 연기할 때 다른 인물들과의 관계에서 보다 친밀한 캐릭터로 보이고자 애쓴다.

찰스 다네이뿐만 아니라 루시가 다른 이들을 향한 따뜻함을 무대에서 어떡하면 잘 보여줄까를 고민하게 된다. 친절하고 따뜻한 루시의 연기는 증오에 불타는 <삼총사> 밀라디의 연기보다 캐릭터를 선명하게 보여주기가 어렵다.”

- 루시는 시드니 칼튼이 자신을 좋아했다는 걸 언제 알았을까.

“시드니 칼튼은 루시를 좋아해서 목도리를 주고 가거나 볼에 뽀뽀도 한다. 요즘 여자들 같으면 이 남자가 자기를 좋아한다는 걸 알았을 텐데 루시는 모른다. 루시가 찰스 다네이와 결혼하고 나서도 시드니 칼튼은 루시의 집을 왕래하고, 루시의 어린 딸에게 책을 읽어줄 정도로 루시와 친하다.

반면에 루시는 찰스 다네이만 바라본다. 루시가 보기에는 시드니 칼튼이 멋진 인물로 설정하지 않아야 가능한 상황이다. 문제는 시드니 칼튼을 연기하는 세 배우들이 하나같이 멋있다는 사실이다. 시드니 칼튼이 남편인 찰스 다네이보다 덜 멋있어야 하는데 문제다.(웃음)”

- 루시를 짝사랑하던 시드니 칼튼을 루시가 알아보지 못한 것처럼, 김아선 배우를 짝사랑한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 적이 있는가.

“중고등학생 때 저를 좋아하던 오빠가 있었다. 학교를 가기 위해 버스 정류장에 있으면 건너편에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기만 했다. 그 오빠가 저를 오랫동안 좋아했다는 걸 극 중 루시처럼 나중에야 알았다.”

- 시드니 칼튼이 자신을 사랑했다는 걸 루시가 일찍 알아챘다면 루시는 누구와 결혼했을까.

“시드니 칼튼은 여자 입장에서 연민을 느끼게 만드는 남자다. 누가 보호해주지 않으면 서 있을 수조차 없어 보일 정도로 연약해 보이는 남자가 시드니 칼튼이다. 여성의 입장에서는 보호 본능을 일깨우는 남자가 시드니 칼튼이다. 저 자신이 루시의 입장이라면 이십 대에는 시드니 칼튼을 남편으로 택했을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극 중 설정대로 찰스 다네이를 선택했을 거다.”

- <삼총사>에서 밀라디를 연기할 때 일본 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 루시마네뜨 김아선
“처음 일본에서 공연할 때 관심을 많이 받은 이들은 저와 같은 뮤지컬 배우가 아닌 아이돌 배우였다. 아이돌 배우를 관심 있게 보다가 ‘아이돌 오빠와 잘 어울리는 상대 배역이네’ 하면서 뮤지컬 배우들도 주목받기 시작했다. 아이돌 배우에 대한 사랑이 뮤지컬 배우에 대한 사랑으로 커진 것이다. ‘우리 오빠에게 잘 해주세요’ 혹은 ‘잘 어울려요’ 하고 좋아하는 분들이 많았다.

일본 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할머니 팬이 사인을 받으실 때 90도로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한다. 너무나도 미안할 지경이었다. 호텔로 찾아오는 일본 팬도 있었다. 제가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잘 도착했는지, 선물을 잘 쓰고 있는가를 카톡으로 세세하게 이야기 건네는 팬도 있다. 공연이 끝나면 배우에게 ‘수고했다’고 덕담을 건네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일본 팬들에게 정말로 감사하고 있다.”

- 이십 대에는 <미스 사이공>의 KIM처럼 청순가련형의 역할을 하다가 센 역할을 맡아서 억울하지는 않았는가.

“개인적으로는 <삼총사>의 밀라디나 <보니앤클라이드>의 블렌치 역할이 행운이다. 앞으로 제가 연기해야 할 캐릭터들이다. <두 도시 이야기>의 루시나 밀라디, 블렌치 모두를 다양하게 소화할 수 있다는 점이 너무나도 행복하다.

연기하면서 제 안에 다양한 모습, 이를테면 누군가를 복수심에 불타서 죽일 수도 있고, 악녀도 될 수 있지만 수다쟁이 아줌마가 될 수도 있다는 면이 있다는 걸 발견하고 있다. 여배우가 성숙한 역할을 맡아가는 과도기의 나이가 제 나이다. 그런 면에서 밀라디와 블렌치는 행운의 역할이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