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내부에서 이병순 신임사장 취임 이후 이명박 정부의 ‘땡이뉴스’ 시도가 본격화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그러나 방송 민주화 투쟁을 거치며 가다듬은 ‘편성규약’ 등 기존 제도를 기반으로 방송 프로그램의 독립성을 지켜갈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관건은 KBS 내부 구성원들의 의지라는 얘기다.

▲ KBS <뉴스9> 8월 31일 보도 '사찰 만여 곳 ‘정부 종교 편향’ 규탄 법회'
지난 3일 KBS 사원행동은 총회에서 “불교대회를 전한 KBS뉴스에서 ‘어청수 경찰청장은 사퇴하라’는 팻말 문구가 화면에서 삭제한 채 방송됐다”고 주장했다. 사원행동에 따르면 지난 8월 31일 KBS <뉴스9>의 ‘사찰 만여 곳 ‘정부 종교 편향’ 규탄 법회’ 보도에서 불자들이 들고 있던 어청수 퇴진 손팻말이 컴퓨터그래픽으로 지워져 방송됐다는 것이다. 이들은 “비슷한 사례가 많이 진행되고 있다”면서 “이명박 대통령에 부정적 내용이 포함된 부동산 관련 프로그램에도 제재가 가해지고 있다”고 밝혔다. (▷ 관련 기사 : ‘졸속 구조조정 저지’ ‘제작자율권 확보’에 총력)

청와대, 사장 교체하자마자 ‘KBS 압박’ 들어가나

같은날 저녁 KBS 본관앞에서 방송장악·네티즌탄압 범국민행동이 진행한 ‘방송의 날 특집 <광장100분토론> - 방송, 민주주의를 말하다’에서도 이같은 주장이 제기됐다. 오는 9일 KBS가 제작하는 대통령의 ‘국민과의 대화’와 관련해, 김현석 KBS 사원행동 대변인은 “청와대에서 ‘국민과의 대화’에서 본질에 맞지 않는 촛불 시위 진압 전경, 장미란 역도 선수 등을 질문자로 내세우자는 요구를 하며 간섭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우리 KBS 제작진들이 양심이 살아있어서 압박에 굴하지 않고 거부했다”며 “사원행동은 제작권 침해 사항에 대해 신고받고 있다”며 “일일이 대응해서 싸울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해 청와대 쪽은 “아이디어 차원에서 의견을 냈을 뿐”이라고 해명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밖에도 지난 2일 방송의 날 기념식 자리에서 한나라당 추천의 권혁부 KBS 이사가 이병순 신임 KBS 사장에게 “<시사투나잇> 프로그램 내용이 이명박 대통령을 비판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알려져 물의를 빚고 있다.

지난달 27일 이 사장이 취임사에서 강조한 △기획 단계에서부터의 사전 게이트 키핑 △제작진과 출연진의 자율적 내부 규제 △일부 프로그램의 존폐 검토 등을 미루어 볼 때, 권 이사와 이 사장 사이에 오간 <시사투나잇> 관련 대화는 상당한 압박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편성규약 등 언론자유 보장 장치로 내외부 압력에 맞서야”

그러면 KBS는 과거 전두환 정권의 ‘땡전 뉴스’ 시절로 회귀하게 되는 것일까. 이와 관련해 일각에서는 “지난 20년간 벌인 언론독립 투쟁의 성과가 있으니 쉽게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낙관론이 등장하고 있다.

양문석 언론개혁시민연대 사무총장은 3일 <광장100분 토론>에서 “KBS 내부 종사자들이 ‘이제는 진지전’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결코 막연한 얘기가 아니다”면서 “외압을 거부할 수 있는 편성규약 등 진지전을 위한 수단이 엄연히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 3일 방송장악·네티즌탄압 범국민행동이 진행한 ‘방송의 날 특집 <광장100분토론>’에서 양문석 언론연대 사무총장이 발언하고 있다. ⓒ정영은
KBS는 방송법 제4조 4항에 따라 방송프로그램 제작의 자율성을 보장하기 위해 취재 및 제작 종사자의 의견을 들어 방송편성규약을 제정·공표해야 한다. 이에 KBS는 2001년 ‘방송 편성규약’을 제정했고, 노사협의를 거쳐 실효성을 강화하는 내용으로 개정한 규약을 2003년 11월부터 시행하고 있다.

2003년 당시 KBS 내부 종사자들의 거센 저항으로 개정된 새로운 편성규약은 옛 규약 제12조(실천적 조화) ‘공사의 사장이 편성과 방송 제작의 최종 권한을 보유한다’ 등의 부당한 조항을 폐지함으로써, 언론의 내적 자유와 편집제작권 보장을 한층 강화하는 내용을 뼈대로 하고 있다.

KBS는 편성 규약의 제도적 보장을 맡은 기구로 ‘편성위원회’를 두어, △보도위원회 △TV위원회 △라디오위원회 등 3개의 ‘본부별 편성위원회’와 ‘전체 편성위원회’ 등 2단계로 운영하고 있다. 취재·제작 책임자와 실무자 대표가 각각 같은 수로 참여해 구성된 본부별 위원회에서 해결하지 못 하는 안건이 발생할 경우, 이를 노사가 구성한 전체 편성위원회인 ‘공정방송위원회’에서 다시 다루는 방식이다.

핵심은 KBS 내부 언론인들이 자기검열로 눈치보기를 하지 않는 한, 사장이나 대통령 마음대로 압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KBS 편성규약 총칙의 제1조(목적) ‘내외의 부당한 간섭과 압력으로부터 방송의 독립을 지키고 취재 및 제작의 자율성을 보장함으로써 방송의 공정성 및 공익성을 실현하고 국민의 권익을 보호함을 목적으로 한다’에 명확히 담겨 있다.

기자들 시작으로 내부 반발 이어질 듯…네티즌 KBS 앞 촛불 집회도 계속된다

결국 ‘이병순 호 KBS’의 운명은 KBS 내부 종사자들 손에 달린 셈이다. KBS 사원행동 소속 직원들이 ‘불법 이사회와 불법 사장 퇴진’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는 가운데, 지난 3일 방송의 날에는 KBS 보도국 소속 입사 10년 차 이하의 젊은 기자 170명이 기자출신 이병순 사장에 대해 “인정할 수 없다”며 사원행동의 퇴진 투쟁을 적극 찬성하고 나섰다.

▲ 3일 서울 여의도 KBS 본관 2층 민주광장에서 'KBS 젊은 기자들'이 기자회견을 열어 "방송독립을 위해 끝까지 싸우겠다"는 결의를 밝히고 있다. ⓒ레디앙 손기영

KBS 사원행동 쪽은 “현재 PD, 아나운서 등 다른 직종들도 기자회견을 준비중”이라면서 “정부와 한나라당은 ‘국가기간방송법’ 통과로 KBS의 예산권 등 ‘길들이기’ 시도를 계속할 것이지만, 내부에서는 이길 때까지 희망의 근거를 계속 만들어내겠다”고 강조했다.

한편 지난 6월부터 시작된 네티즌들의 KBS 앞 ‘공영방송 수호’ 촛불집회도 계속되고 있다. 제45회 방송의 날(9월 3일) KBS앞 촛불 집회의 자유발언대에 나선 KBS 종사자는 “올해 방송의 날이 ‘치욕’으로 불린다. 그러나 방송인으로서 민주주의를 위해 할 일이 있다는 의미에서 ‘축복’의 날이기도 하다”면서 “여러분의 촛불이 비굴한 KBS 앞을 점거하고 있으니 큰 힘이 된다”며 감사의 뜻을 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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