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방송담당 기자들이 선정한 올해 최악의 프로그램, 드라마 사상 국내 최초로 종영 요구 시위가 빗발쳤던 드라마, 그럼에도 최고 시청률 49.7%. 인어아가씨는 아이러니하게도 그해 가장 미움을 받은 드라마이기도 하면서 또한 가장 사랑을 받은 드라마였기도 했다.

막장 드라마 붐의 효시가 된 이 드라마의 유해성이나 딸기를 칫솔로 씻어 먹는 사이사이의 황당무계함이야 굳이 열거해서 무엇하겠느냐마는, 그럼에도 이 드라마 초반의 혼을 뺏기는 것 같았던 아찔한 속도감과 높은 몰입도만큼은 세상 그 어떤 드라마를 가져다 놓아도 왕 중의 왕을 차지할 만큼 대단했었다. 그건 아마도 임성한 작가 자신조차도 뛰어넘을 수 없을 전설일 것이다. 가정을 버리고 내연녀를 택한 아버지를, 신을 대신해서 천벌을 내리고자 복수의 화신이 된 아리영이 분노의 살사 춤을 추던 그 무렵은.

하지만 그 파워풀했던 절절한 분노와 사다코보다 오싹했던 아리영의 애끓는 한은 악마와 계약을 맺은 듯했던 임성한 작가의 필력도 필력이지만, 그 사람이 아리영이 아니었더라면 에너지의 절반도 우린 체감하지 못했을 것이다. 여성 복수극의 바이블, 장서희가 아니었더라면.

그래서 돌아온 복수의 화신 장서희가 드라마 ‘뻐꾸기 둥지’에서 도리어 복수를 당하는 역할이라는 설명을 들었을 때 조금은 어안이 벙벙했었다. 그러고 보니 질릴 만도 하지, 라고 그녀를 이해했으나 마음 한구석으로는 참 비효율적인 캐스팅이라는 생각을 아니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건 뭐 애써 유재석을 모셔다 놓고 패널에 만족하는 것과 다름없지 않은가.

캐스팅에 의문을 넘어 불안하기까지 했던 건 장서희와 맞장을 뜰 배우의 연기력에 그리 신뢰가 가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장서희를 대신해 브라이드(영화 Kill Bill)의 칼을 움켜쥔 배우는 바로 이채영. 그리 익숙하지 않은 배우라 필모그래피를 훑어보니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누벼온 적지 않은 경력의 쪽진 머리가 참 잘 어울리는 그녀. 장서희 복수 인생 최초로 도리어 복수를 당하는 역할을 주도할 연기자라면 나름 믿을 만한 구석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걸어봤다. 그랬는데.

이채영이 분한 이화영은 악역도 선역도 아닌 캐릭터다. 흔히 복수극에서 복수하는 사람은 시청자의 동정과 응원을 받는 착한 범죄자이지만, 드라마 속의 이화영은 도무지 응원해주고 싶은 맛이 나지 않는 사람이니까. 이 드라마의 초기 설명에서 이화영은 오빠를 죽음으로 내몬 백연희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녀의 대리모를 자청하여 아이를 빼앗고 파멸시키는 극단적인 인물이다. 드라마를 보지 않고 순전히 인물 소개만 읽으면 도대체 이화영에게 복수를 당하는 대상인 백연희, 즉 장서희가 얼마나 큰 죄를 지었기에 이 정도 스케일의 복수를 당하는 건가 싶다.

그런데 막상 드라마에서 전개된 오빠의 사망 원인이라는 것이 참 황당하다. 백연희와 이화영의 오빠 이동현(정민진 분)의 동거 숙소에 백연희의 부친이 쳐들어와 딸을 끌고 나가고 그걸 쫓아가던 이동현이 백연희의 스카프에 정신이 팔려 교통사고가 나버린 것이다. 이건 분명 이동현의 부주의로 생긴 불운한 사고일 뿐인데 왜 백연희의 살인이 되어버렸을까? 그 다음 장면에서 떨어진 스카프를 주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는 이화영을 보고선 이 여자가 터무니없는 오해를 하나 싶었다. 그렇게라도 되지 않으면 복수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이 안 되니까.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이화영이 사고 정황을 정확히 알고 있으면서도 백연희에게 살의를 품었다는 것이다. 분명 타살도 아니고 오해도 아니다. 오빠가 백연희를 쫓아가다가 사고를 당했다는 너무나 직관적인 사실을 그녀 자신이 입으로 또박또박 읊고 있으면서도 백연희가 오빠를 살해했다는 터무니없는 확신에 매달리고 있는 이화영.

이 가당치 않은 복수의 동기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화영이라는 캐릭터를 보다 심도 있게 관찰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한마디로 이화영은 정신이 아픈 사람이다. 착하고 성실한 오빠, 게다가 의대생이라는 촉망받는 비전. 이 자랑스러운 오빠가 선사할 찬란한 미래 덕분에 현실의 고단함이 와 닿지 않았을 화영. 인생의 빛과 소금이자 터널 바깥의 빛이었던 오빠를 잃어버린 순간 주변은 암흑이 되었다. 빛이 보이지 않았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6년을 씹고 뜯어 되풀이하다 보니 결국 ‘오빠가 죽지 않았더라면.’이라는 IF는 망상을 거듭해 비틀린 원망과 서슬 퍼런 증오가 되었다.

화영의 궁극적 복수의 대상은 그녀의 오빠 이동현이다. 다시 6년을 넘어 오랜만에 오빠의 유골함 앞에 섰을 때 입술에 조소를 매달고 내뱉은 재회의 인사는 그리움이나 고마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원망과 증오 그리고 비아냥. “나야, 오빠. 오랜만이네. 6년 동안 오빠 얼굴 잊지 않으려고 밤마다 생각했었어. 알아? 그래, 오빤 늘 이 얼굴이야. 난 괴롭고 고통스러운데 오빤 늘 편안해.”

백연희는 이화영이 보상받지 못한 6년이다. 어쩌면 오빠가 제공해줬을지도 모를 찬란한 미래. 그날의 사고 이후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화영의 눈앞에 한 사람은 죽었고 한 사람은 살아남았다. 죽은 자는 대답이 없으니 살아남은 백연희가 6년 전, 아니 12년 전 사고가 일으킨 나비효과의 모든 책임을 떠맡게 된 셈이다. 살해당한 오빠를 위한 복수라는 거창한 대의명분 아래 숨은 이 여자의 비틀린 오빠를 향한 증오.

문제는 이토록 복잡다단한 이화영의 심리를 1회에 6년을 뛰어넘는 이 드라마에서 아우르기엔 다분히 역부족이라는 것이다. 제작진은 모노드라마를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니며 시청자 또한 스트레스 해소용의 막장 드라마를 그렇게 세세하게 풀어헤쳐 볼 여유는 없다. 설상가상은 이토록 복잡한 캐릭터를 악역과 주인공의 경계선에서 시청자를 호소력 있게 끌어당길 연기력을 가진 배우로 이채영을 선택했다는 점이다. 적어도 이 드라마의 10회까지 그녀는 “도대체 무슨 권리로 복수하겠다는 거야?”라는 시청자의 짜증 섞인 적개심 외에 그 어떤 감정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이채영의 아쉬운 연기력이 그렇지 않아도 억지에 가까운 복수의 동기를 얼마나 초라하게 만들었는가를 돌이켜 보자. 오빠의 후배 성빈과 6년 만에 재회한 그녀가 새삼 12년 전의 사고를 돌이키면서 오해는 아니었지만 끝까지 오해하겠다고 억지를 부리는 장면을. “오빠가 죽었어. 남도 아닌 내 오빠가 살해당했다고.” 그를 백연희의 개로 칭하며 그녀가 얼마나 부도덕한 여자인지를 되새기는 이화영의 말에 넌 아직도 그러고 있느냐는 듯 황당한 얼굴로 남자가 되묻는데. “살해? 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살해라니.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절대 아니야.” 남자의 말을 받아치며 증오의 행진을 하는 이화영. 맹수가 습격하듯 덮쳐와 시청자를 소름 끼치게 해야 했을 이 장면에서 이채영의 대사 처리가 어찌나 기계적이고 단조롭던지. 너무나도 어색한 선전포고에 위협이 느껴지기는커녕 오히려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말하고 싶겠지. 살해가 아니라 사고라고.”

“오빠를 오토바이 타고 따라가게 만든 사람이 누구지?! 그 여자. 백연희.” 정말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쓰는데 연기까지 어색하니 코미디가 될 수밖에 없다. 아빠에게 납치된 백연희 때문에 오빠가 그녀를 쫓아야 했고 그래서 사고를 당했으니 백연희가 살인자다. 이 터무니없는 전제는 아리영의 박력이 아니고서야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는 비논리다. “얼마나 상처를 받았으면 저렇게나 꼬인 건가.” 배우와 박력과 호소력에 떠밀려 상식과 논리가 아닌 온전히 감정과 감정으로만 이해시켜줘야 할 캐릭터가 막상 배우의 연기력이 와 닿지 않으니 생떼 쓰기로만 보일 뿐이다.

“풀장으로 와주시겠어요?” 한때는 개망나니였더라도 지금은 뼈가 녹는 애처가인 백연희의 남편 정병국(황동주 분)을 유혹해 본격적으로 복수의 시동을 걸어보려 하는 이화영. 그레이스 리라는 가명까지 걸고 수영장으로 그를 불러 몸으로 유혹하는 장면부터가 온통 클리셰 덩어리라 웃음이 나오는데, 저녁 시간대 가족과 보기에 민망할 수준의 선정적인 수영복을 입고 뇌쇄적인 눈빛으로 정병국을 유혹하는 연기에 애초 의도했을 여성미와 섹시함은 조금도 담겨있지 않았다. 차라리 건장함마저 느껴지는 저 의도적인 연출을 되새기며 불륜의 낌새를 피우는 정병국이 멍청하다고 느껴졌을 정도.

이화영이 백연희에게 품은 부조리한 복수의 동기. 그것은 마치 메멘토의 주인공처럼, 복수할 대상을 찾는 것만이 그저 삶의 동기이기 때문이다. 6년간 벼르고 별렀을 그 모든 분노와 원망이 백연희를 마주친 그 순간, 한꺼번에 쏟아져 내렸다. 이토록 복잡하고 섬세한 여자 이화영을 다루기에 이채영의 연기는 너무나 단조롭고 무미건조하다. 훗날 아이를 뺏길 장서희(백연희 역)이 패자부활전을 치를 그날까지 이화영을 이해 못할 시간들이 아깝고 또 아쉽다. 하필 장서희의 복수전을 포기하면서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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