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는 잔잔한 소시민의 일상을 그리는 듯하면서, 스크루볼 코미디 문법을 엿볼 수 있는 독특한 멜로영화다. 통상적인 스크루볼 코미디는 개와 고양이처럼 서로 잡아먹지 못해 안달하는 두 남녀가 옥신각신하다가 서로에게 눈이 맞는 이야기를 다룬다.

영화 <경주>에서 신민아가 연기하는 공윤희는 박해일이 연기하는 최윤에게 처음부터 호감을 가진 게 아니었다. 춘화를 찾는 최윤을 보고는 변태인 줄로만 알고 휴대전화로 뒷담화를 하다가 나중에는 계모임에 초청하기에 이른다. 스크루볼 코미디의 변형된 형태다.

장률 감독은 동양화처럼 영화를 만들 줄 아는 감독이다. 특정한 메시지를 관객에게 강요하기보다는 사색하고 곱씹을 수 있는 공간적인 여유를 중요시하는 감독이기에 그렇다. 그는 경주라는 공간에 맞게 리듬에 맞춰 영화를 제작해야지, 특정한 메시지를 관객에게 부여하는 것을 지양하고 있었다. 동양화 속 여백의 미처럼, 영화를 보면서 관객이 맘껏 사유할 수 있는 정신적인 여유를 강조하는 감독이 아닐 수 없다.

▲ 사진 Ⓒ박정환
- 영화 속 배경을 경주로 택한 이유는

“1995년에 한국을 방문해서 경주에 간 적이 있다. 영화처럼 두 형과 어느 찻집에 들어갔는데 그 안에서 춘화를 보았다. 그 후 그 중의 한 형이 돌아가셨다. 빈소를 찾기 위해 대구를 찾는다는 영화 속 설정까지는 실화다. 그 이후부터 전개되는 영화 속 이야기는 만든 이야기다.”

- 극 중 주인공인 최현(박해일 분)은 어떤 캐릭터인가

“한국을 떠나 중국에서 살면서 중국 여자와 결혼했다. 아는 형의 죽음으로 한국을 방문하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한국에 들르면서 옛 한국에서의 추억을 떠올린다. 공간이 변하면 사람의 정서도 변한다. 한국에 있을 당시의 옛 사랑이 생각나서 윤진서가 연기하는 여정을 떠올린다. 최현은 유명한 교수다. 그러면서도 보통 남자의 정서를 담고 있다. 최현이라는 캐릭터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란 어렵다. 재미있으면서도 엉뚱하고, 아픔이 있는 복잡한 남자다.”

- 공윤희(신민아 분)는 최현을 처음 볼 때는 변태로 오인하지만 계모임에 초청하기도 한다

“최현이 정말로 변태였으면 초청하기는커녕 계모임에 부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공윤희와 최현에게는 동질감이 있다. 동질감이 있으면 서로에게 끌린다. 우리가 실제 살면서 일면식 하나 없는 낯선 사람을 모임에 초청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왜 불렀나 하는 이유는 모르는 경우가 많다. 계모임에 최현을 불렀는데 동질감 때문에 최현을 향한 감정이 깊어진다.”

▲ 사진 Ⓒ박정환
- 영화 속에는 한국인만 배경 인물로 등장하지 않는다. 일본인 관광객도 있고 중국 그림도 등장한다. 한국 영화지만 다국적인 설정이 눈에 띈다

“한국이 단일민족이라고는 하지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외국인이 많이 모여 사는 나라가 되었다. 경주만 가보아도 외국 관광객이 많다. 관광객이 잠깐 스쳐 지나가도 정서에 영향을 미친다. 영화 속 찻집도 실제로 일본 관광객이 많이 찾아온다.”

- 영화 <경주>로 어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공윤희의 집에 걸린 중국 그림에는 이런 글이 있다. ‘사람들이 흩어진 후에 초승달이 뜨고 하늘은 물처럼 맑다’는 글이다. 이 정서가 영화 전반에 깔려 있다. 하지만 이 정서가 다가 아니다. ‘한 잔 하고 가세’라는 글도 있다. 이런 메시지도 영화 안에 포함된다. 요즘에는 ‘한 잔’은 끊고 ‘합시다’만 있다. 한 잔 하고 가자는 이야기 안에는 여유가 내포되어 있다.”

- 박해일과 신민아는 어떤 배우인가

“촬영 현장은 바쁘게 돌아간다. 촬영 일정 때문에 서로가 예민하기 쉽다. 한데 이번에는 예민해지는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편안하게 촬영할 수 있었다. 영화 찍으면서 이런 적은 처음이다. 경주라는 공간이 사람을 차분하게 만들어준 것도 있다. 박해일과 신민아는 생각이 많은 배우다. 박해일이 연기하는 최현은 학자다. 생각을 많이 해야 한다. 생각이 많으면 리듬이 빠를 수가 없다.

신민아가 연기하는 공윤희는 찻집 주인이다. 보통 커피점과 찻집의 리듬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커피점은 손님에게 빨리 제공해야 한다. 하지만 찻집은 다르다. 우리 일상의 리듬보다 훨씬 느리다. 만일 누군가가 찻집에서 빨리 행동했다가는 찻집이라는 공간과 맞지 않는다는 걸 대번에 느낄 수 있다. 신민아가 연기한 움직임은 실제 찻집 주인보다는 빠르다. 만일 영화를 찍을 때 실제 찻집 주인의 몸놀림대로 연기했다면 관객이 참지 못했을 것이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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