잦은 결방으로 한동안 '목요드라마'라고 불리기도 했던 MBC 수목드라마 개과천선이 정상 시간을 확보했다는 소식에 기뻐했던 것이 바로 엊그제 같아서, 이 드라마의 조기 종영 소식은 더 황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MBC는 애초 18부 완결로 기획되어 있었던 '개과천선'을 2부를 줄인 16부로 마무리하겠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으로 전 시청자를 비탄에 빠뜨렸죠.

역시나 첫 반응은 외압에 의한 조기 종영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었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혈한의 변호사가 기억을 잃고 난 이후 눈을 가린 정의의 여신의 의미를 되새기며 지난 삶을 반추해본다! 다소 판타지 같은 도입부지만 빌런에서 슈퍼 히어로로 재탄생한 극의 주인공 김명민이 맞서 싸우는 굵직굵직한 사회의 어둠은 현실을 반영한 이 시대의 아픔이었으니까요. 2007년, 태안반도 기름 유출 사고와 키코 사태 등 우리가 이미 잊어버린 지난날의 부조리를 김명민의 가슴을 울리는 연기로 되짚어보는 개과천선은 드라마계의 그것이 알고 싶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이 드라마가 정상적인 마무리를 하지 못한다는 비보에 당연히 외압으로 인한 조기 종영을 의심해볼 수밖에요.

이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제작진은 드라마 내부적인 문제일 뿐 외압은 없었노라고 일축했습니다. 하지만 그 대신으로 내놓은 조기 종영의 원인은 외압이라는 이유보다도 더 당혹스러웠습니다. MBC는 공식입장을 통해 "줄어든 2회 방송분은 주연배우인 김명민 씨가 다음 작품을 준비하면서 추가 촬영이 어려운 상태였고 후속작인 '운명처럼 널 사랑해'가 방송 준비를 마친 상태여서 회차를 줄일 수밖에 없었다."라고 밝혔습니다. 또한 MBC의 홍보 관계자는 한 일간지를 통해 "주연배우인 김명민과 스케줄을 조정하지 못해 조기 종영을 결정했다."라는 말로 못을 박았습니다. 두런두런 다른 이유를 열거하기도 했지만 결국, 조기종영의 궁극적인 원인이 온전히 김명민의 스케줄 때문이라는 강한 뉘앙스를 풍기면서요.

MBC의 공식 입장이 이렇다보니 당연히 각 기사의 헤드라인 또한 '김명민의 스케줄 조정 문제로 개과천선이 조기 종영되었다.'로 일맥상통하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개과천선은 김명민 때문에 조기종영하는 드라마로 기억에 남게 되었으며, 김명민 또한 자신의 작품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무책임한 배우의 낙인을 찍게 됩니다.

하지만 저는 이 MBC의 공식 입장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지목된 대상이 다름 아닌 그 '김명민'이었으니까요. 김명민이 누굽니까. MBC에서 다큐멘터리로 기획했을 만큼 연기자의 삶을 거장의 수준으로 주목하게 한 배우입니다. 팬의 입에서 그만 좀 고생하라는 볼멘소리가 나올 만큼 몸을 아끼지 않고 자신을 혹사하고 학대하면서까지 작품의 완성도를 끌어올리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이고요. 거의 희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책임감과 배우의 자긍심을 가진 배우가 본인의 드라마를 조기 종영시키는 원인으로 자리잡히다니요. 이건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의뭉스러운 이유를 놓고 논란이 가속화되자 김명민의 소속사 측은 그의 팬카페를 통해 입장을 전했습니다. MBC의 발표와는 사뭇 다른, 더 넓은 범위의 이유를 살펴볼 수 있는 글이었습니다. "먼저, 팬분들께 심려를 끼친 점에 대해 사과의 말씀부터 전하고 시작하겠습니다. 많이들 놀라고 속상해하고 실망하고 혹은 분노하고... 그러실 줄 알고 있습니다." 이 글의 서두만 살펴보아도 당시 김명민이 그의 팬들에게조차 실망과 분노의 총알받이가 되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온종일 확인되지 않은 말들이 확대재생산되는 것을 관망하는 것만이 최선은 아니라고 판단되었고 공카에는 팬분들께 입장을 표명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여 이렇게 글을 남깁니다." 그리고 소속사 관계자는 이날 오전에 나왔던 기사만 놓고 본다면 조기 종영의 원인이 온전히 김명민의 후속 작품 스케줄 때문인 것 같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라는 항변을 했습니다.

MBC의 입장 발표만 보면 김명민이 촬영 도중 무리하게 후속작을 결정해서 일이 이렇게 된 것 같지만, 현재 조기 종영의 원인으로 떠돌고 있는 김명민의 후속 작품 '조선 명탐정 : 놉의 딸'은 개과천선 촬영 이전부터 약속되어있었던 스케줄이며, 배경 선정의 어려움 때문에 촬영 일자를 미룰 수도 없는 '불가피한 상황'이라고 합니다. 세월호 침몰과 6.4 지방 선거 그리고 월드컵 출정식까지 겹친 연이은 결방으로 계획과 달리 일정이 꼬이게 된 것이죠. 하지만 조기 종영을 이끈 궁극적인 원인은 결방이 아니라 '결방을 했음에도 정상 촬영을 할 수 없었던 열악한 제작 환경' 때문이었습니다.

김명민의 소속사는 결방으로 방송 일자가 늦춰지자 당시에는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마치 터지기 직전의 시한폭탄처럼 여유 없이 빡빡한 촬영을 하던 개과천선의 제작 환경은 언제 펑크가 나더라도 무리가 없는 상황이었으니까요. 심지어 목요일 방송분을 목요일에 찍어서 내보내야만 했던 최악의 제작 환경은 도저히 배우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종류의 불가항력이었습니다. 이 글을 읽고 문득 떠오르는 것은 언젠가 연예 정보 프로그램에서 개과천선을 촬영 중인 김명민을 인터뷰했을 때였습니다. 촬영장에 서 있는 김명민은 오늘 무슨 장면을 촬영하는지도 몰라 A4 용지를 뒤적여야만 했습니다. 대본이 정상 시간에 도착하지 않으니 책 대본을 받은 기억이 없고 촬영 당일 A4 용지에 담은 이른바 '쪽대본'으로 그 길고 긴 법정 용어를 외워야만 했던 김명민이었습니다.

언젠가 명민좌 신드롬이 돌았던 그해 제작된 MBC의 다큐멘터리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김명민이 하나의 캐릭터를 연구하기 위하여 얼마나 노력하는 사람인지를 익히 알고 있을 것입니다. 김명민은 주어진 캐릭터를 마치 사법고시 공부하듯 파고드는 노력형 천재의 교본 같은 배우입니다. 그 분야의 전문가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의 연구와 분석으로 캐릭터의 리얼리티와 입체감, 그리고 작품의 완성도에 공을 들이는 데 혼신을 기울이는 배우죠. 김명민은 즉흥적으로 연기하는 스타일의 배우가 아닙니다. 이런 배우가 생방 촬영과 쪽대본이라는 극악의 상황에서 얼마나 힘이 들었을지, 그럼에도 이토록 시청자의 가슴을 울리는 연기를 보여줬다는 것은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이런 배우를 조기 종영의 타겟으로 만들어버린 MBC의 비겁함이겠죠.

"결방이 없었더라면 예정된 마지막 방송일은 19일이었고, 세월호 참사 이후엔 불가항력적인 일이었음을 모두가 인지... 26일까지 촬영을 해서라도 18부를 소화하고 이동하기로 사전에 약속도 되어있었지만 촬영현장은 그렇게 돌아가지 못 했던 겁니다.

촬영팀은 A,B팀이 있다지만 배우의 몸은 한 개인데... 그마저 사흘 동안 디졸브되어 밤샘촬영을 하면서까지 기대하시는 시청자들을 위해 끝까지 노력해야 한다던 게 저희 배우인데도 그 이상 무언가 할 수 없었습니다.

본인 스스로도 철저히 준비하지 못한 채로 연기해야만 하는 스트레스를 받으며 힘들어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제 마음도 너무 안타까웠지만 이 또한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불가항력의 결방을 인지했음에도 그 시간을 활용하지 못하여 결국 조기 종영이라는 서글픈 사태를 만들어낸 것은 김명민의 원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김명민은 생방 촬영과 쪽대본이 만들어낸 조기 종영의 희생양이죠. '고생'이 아이덴티티인 배우, 그 누구보다 자신에게 엄격한 김명민이라는 사람에게 작품의 완성도와 책임감은 이른바 사명과도 같았습니다. 이런 배우에게 조기 종영이라는 아픔이 서린 필모그래피가 생긴다는 것은 그 또한 크나큰 수치와 상처로 자리잡을 것입니다. 열악한 환경에서 목소리마저 나오지 않아 입에 기계를 물고 촬영했던 김명민을 조기 종영의 가해자로 돌리는 MBC의 비겁한 행태가 참으로 씁쓸합니다. 개과천선에서 김명민은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피해자를 위해 부조리에 맞서 싸우는 슈퍼 히어로였습니다. 이런 그가 드라마 밖에서 또 하나의 부조리에 맞부딪히게 되는 지독한 아이러니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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