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창극, 생경했다. 분명 낯익었다. 그런데 총리와 함께 읽으니 선뜻 떠오르지가 않았다. 검색창에 이름을 넣고 엔터를 치는 순간 후루룩 쏟아지는 글들을 보며 소름이 돋았다. 이 사람이었구나. 결국, 이런 사람을 골랐구나.

대의제 정치는 언론으로, 언론이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사는 탁 치는 맛이다. 그 맛이 쓰던 떫던 그 맛조차 못 내면 이미 실패한 인사다. 박근혜 정부 인수위 시절 지명했었던 김용준 총리 후보자가 대표적으로 그런 인사였다. 언론은 그 인사에 맛을 느낄 의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는 밋밋하게 물러났다. 국민검사를 총리로 불러낸 안대희 지명자는 좀 달랐다. 새롭진 않았지만 언론은 충분히 맛을 내어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실패했다. 언론이 맛을 내기도 전에 거부됐다. 어쨌든 실패였다.

▲ 친일 망언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는 질문에 문 후보자는 "사과는 무슨 사과"라고 말했다. ⓒ연합뉴스

그리고 문창극이다. 깜짝 놀랐다. 탁 치는 정도가 아니라 두들겨 맞은 것 같았다. ‘책임총리’라더니, ‘안배총리’라더니, ‘화합총리’라더니 ‘뉴라이트’를 넘어 ‘울트라라이트’에 해당하는 이를 총리로 불러냈다. 청와대에 오래 출입한 베테랑 기자조차 발표 5분전까지는 깜깜했다고 했고, 정가에 밝다는 안테나들은 되려 ‘문창극이 누구냐’고 물어왔다. 혼돈의 시간, 혼란의 이름이었다.

이름을 검색해보고, 직관적으로 몇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고 분주했다. 중앙일보와 청와대의 관계, 김기춘과의 인연, 그가 썼던 글들까지. 봐야할 건 많았고, 쓸 수 있는 각은 무한에 가까웠다. 그러나 끝내 문창극 총리의 의의가 무엇인지는 더듬어지지 않았다. 문창극을 호명하며 ‘화합총리’를 말하는 건 호랑이 풀 뜯어먹는 얘기다. 충청 출신이라는 점에서 ‘안배’를 애써 강조하는 모양새를 취했지만, 그는 본인의 정체성이 ‘이북’에 있다고 믿고 있다고 했다. 새누리당 내 충청 인사들조차 그를 낯설어 했다. 언젠가부터 충청의 ‘로얄티’를 따지는 잣대가 된 ‘행정수도 이전’에 있어서 그는 ‘서울=수도’의 지동설을 주창하던 매파 중의 매파였다.

그리고 임명된 지 하루만에 ‘책임’이 날아갔다. 그는 “책임총리 같은 건 들어본 적도 없다”는 흰소리를 했다. 그의 소신을 신뢰했다는 청와대의 설명을 가뿐히 박살낸 말이었다. 그럼 그는 무슨 총리인가, 어떤 총리가 되려고 하는 것일까. 선뜻 떠오르지도 않았고, 깊이 고민한들 헤아려지지 않았다. 그 사이 언론의 표정은 미묘하게 엇갈렸다. 중앙일보는 다소 들떠보였고,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멈칫했다. 나머지 언론은 대체로 이해하지 못했단 점에서 엇비슷했다.

이후 시간 날 때 마다 그의 글들을 읽었다. 취재한 내용들과 겹쳐지며 그의 인생이 보이는 듯도 했다. 기자 생활의 거의 대부분을 ‘정치부’에서 보낸 그는 92년 대선과 97년 대선에서 중앙일보의 ‘전위’였다. 능수능란하게 상황을 조율하는 기막힌 ‘플레이어’였다. 그의 재주가 특히, 빛났던 건 97년 대선 때였다. 그는 이인제를 농락했고, DJ를 겁박하며 이회창을 밀었다. 그의 사주인 홍석현 회장과 경기고 동문인 이회창의 당선을 위해 그는 신명을 바쳤다. 유능한(!) 기자였다.

하지만 졌다. 패배는 슬펐다. 그는 밀려났다. 국민의 정부는 그와의 공존을 원치 않았다. 필력으로 세상을 바꾸려 했던 노련한 야심가는 그렇게 편집국에서 밀려났다. 워싱턴 특파원과 정치부장을 거쳐 편집국장으로의 ‘영전’을 꿈꿨던 문창극은 그렇게 속절없이 다시 미국으로 떠나야했다. 언론이 권력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었던 한 ‘구악’ 기자가 자신이 농락하거나 경멸했던 권력의 횡포로 펜을 놓아야했던 순간이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왔다. 그 원한의 시간을 건너 그의 편향은 저주로 바뀌었다. 그나마 적진을 후비던 날카로운 필력은 진영을 위무하는 둔탁한 몽둥이로 바뀌었다. 그는 시종일관 빈정대며 노무현을, 참여정부를, 386을 그리고 자신을 몰아낸 총합으로서의 호남과 민주당을 사정없이 팼다. 매질의 강도가 높아질수록 ‘우리편’의 환호성은 커졌다. 물밑에서 진영을 조율하던 어둠의 손에서 이미 구획된 진영의 스타로 등극했다. 2000년대 중반, 그는 대포알 이었다.

하지만 세월을 거스를 순 없는 노릇. 늘 그래왔든 이명박 정부의 탄생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지만 그는 조금씩 ‘뒷방 늙은이’로 밀려났다. 이미 정치의 패권을 차지한 마당에 그의 글은 효용성을 잃어갔고, 지배력도 무뎌졌다. 자신이 그토록 저주했던 집단에 사주가 참여한 것을 비탄한 일 때문에 회사 내 입지도 약해졌다. 그는 사실상 자신이 만들었다고 믿던 집단에서 끝내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는 차지해보지 못한 채 그렇게 중앙일보를 떠났다.

중앙일보 내에서조차 그가 ‘총리’로 복귀할 것이라고 봤던 이는 없었던 것 같다. 정치권력과 언론 권력의 거래를 주선하던 몇몇 내부의 거간꾼만이 ‘혹시나’의 마음을 가졌을 뿐, 실제 그가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를 것이라고 믿긴 어려운 세월이었다. 하지만 그는 어떤 힘의 작용인지 아니면 천운의 소산인지 다시 거머쥐었고, 필연적으로 끝내 노출되지 말았어야 할 치부들이 함께 딸려 나오는 '참극'의 상황을 맞았다.

그는 버티고 있다. “사과는 무슨 사과”라는 강단진 응대에서 보건데, 좀 더 버틸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총리가 될 수 있을까. 어려울 것이다. 2007년 6월, 참여정부 말기에 그러니까 아직은 그의 필봉이 정치적 결과를 꽃피진 못했던 때. 그는 ‘정치도 성품이 먼저다’는 칼럼을 중앙일보에 썼다. 그 글에서 문창극은 ‘무엇이 실패한 대통령을 만드는가’를 물으며 ‘부패’와 ‘미숙함’이 두 가지 기준이라고 썼다. 특히, ‘미숙함’에 대해 카터 대통령의 예를 들며 “깨끗한 이미지 덕분에 당선은 됐지만 미숙함 때문에 나라를 멍들게 만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보기에 부패나 미숙함보다 더 결정적인 것이 있으니 바로 ‘품성’이라고 규정했다. ‘아무리 능력이 있다 해도 나쁜 성품을 가지고 있다면 결국 파멸한다’고 일갈했다. 그 글에는 가혹하다 싶을 정도로 자주 ‘노무현’이란 이름이 등장한다. 그는 ‘기자실 폐쇄’ 등의 상황을 열거하며 “대통령의 이런 행동들이 진보라는 이념 때문이라고 보지 않는다. 대통령의 성품 때문은 아닐까. 대통령은 대통령다운 성품을 지녀야 한다. 혹시 그런 자질이 부족하다면 위대한 인물들의 전기라도 보면서 의식적으로 애를 써야 한다. 현실이 아무리 어려워도 대통령이기 때문에 지켜야 할 금도가 있는 것이다”고 조롱했다. ‘성품은 그 사람의 운명’이라고도 썼다. 끝도 없는 빈정거림이었다.

▲ 문창극 총리 후보자의 사퇴를 요구하는 시민사회단체의 긴급기자회견 ⓒ연합뉴스

이 말을 이제 공직에 들어서는 그에게 돌려줄 수 있을 것 같다. 그를 제대로 검증하지 못하고 뽑은 책임은 청와대에 있다. 넌덜머리나는 ‘미숙함’이다. 청와대는 그를 뽑은 이유로 내심 ‘부패하진 않았다’고 에둘렀다. 이건, 아직 확인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부패’나 ‘미숙함’보다 더 결정적인 ‘품성’에 문제가 있다. ‘식민 지배를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건 그가 보수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건 '친일'도 아니라 '반인류'에 가까운 품성이다. 독일에서 나치를 긍정하는 이는 단언컨대,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기 어렵다. 그는 대통령을 향해 서슴없이 ‘필부만도 못한 행태를 보였다’고 조롱했었다. 38년 기자 외길 인생, 언론인 출신 첫 총리 후보자 문창극의 행태는 과연 필부만은 한 것인가. 마지막으로 그의 말을 한 마디만 더 돌려주겠다. “성품이 모든 것을 말해 주기 때문이다” 성품의 사전적 의미는 ‘사람의 성질이나 됨됨이’이다. 문창극의 지금 문제는 동시대를 살아갈 한국인으로서의 됨됨이 차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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