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권세력의 기세가 갈수록 등등해진다. KBS 사장을 축출하는 과정에서 내부저항이 격렬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의외로 미약했기 때문이다. 노조가 낙하산 투하에 방관자적 자세를 보임으로써 KBS 장악을 위한 정지작업이 착착 진행 중이다. 여기에서 힘을 입자 실세라는 이 입, 저 입이 서로 뒤질세라 KBS2, MBC 민영화를 거침없이 내지른다. 이 판에 여세를 업고 몰아친다는 기세다. KBS 사장 낙하산 투하성공에서 얻은 자신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형국이다.

▲ KBS노조는 공영방송을 사수하고 정치독립적인 사장선임제를 쟁취하겠다고 했으나, 물리력까지 동원한 이병순 사장의 취임을 전후해 침묵으로 일관했다. 사진은 지난 7월 KBS노조의 펼침막이 걸린 서울 여의도 KBS 본관 전경. ⓒ미디어스
KBS 노조는 정연주 사장의 연임을 반대했다. 그 까닭에 정 사장 축출에서 보인 노조의 행태는 논외로 치자. 노조는 KBS 건물 벽면에 ‘MB정권 낙하산 사장 임명반대’, ‘사수!!! 공영방송’이란 집채만한 현수막을 내걸었다. KBS는 스스로 입이 닳도록 국민의 방송이라고 되뇌었으니 이것은 국민과의 약속이다. KBS 노조는 낙하산 투하에 대비해 파업을 묻는 찬반투표를 실시했다. 압도적으로 가결됐다. 이것은 조합원과의 약속이다. 신임사장은 집권세력이 대책회의까지 갖고 골라서 내려 보낸 낙하산이다. 그런데 노조는 공언했던 것과는 달리 반대하지 않는다. 무엇 때문에 낙하산 반대 삭발결의대회를 갖고 소란을 떨었는지 자문할 일이다.

정권은 KBS 장악을 위해 폭력적 사태를 연출했다. 이사회는 비상임 이사로 구성된 의결기구로서 집행력이 없다. 그런데 이사장이 경찰투입을 요청했다. 이것은 불법, 탈법의 문제가 아니다. 법이 필요 없다는 무법적 행태다. 물경 버스 250대의 경찰병력이 KBS 건물 외곽을 포위했다. 청내에는 수 백명의 사복경찰과 청원경찰이 투입되어 직원의 출입마저 봉쇄했다. 이것은 경찰쿠데타이다. 하지만 노조는 권력의 주구가 보인 행태에 대해 조직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다. 방송사가 경찰병력의 수중에 놓였다는 사실은 통탄할 일이다. 계엄령을 선포한 군사정권도 착검한 초병을 출입문에 세워 경계임무만 수행하도록 했을 뿐이다.

사장선임을 위한 이사회 개최의 시간과 장소를 반대파 이사에게는 통고하지 않았다. 이것은 원천무효이다. 노조는 경찰병력 투입에 대해서도 이사회 개최의 적법성에 대해서도 이사장의 책임을 추궁하지 않는다. 노조가 정권의 폭력적 KBS 장악에 암묵적으로 동조했다는 비난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KBS는 국민의 방송이다. 그런데 KBS가 구성원의 소유물로 알기 때문에 정권에 추종적인 행동을 하고도 반성을 모른다. 노조뿐만이 아니다. 대다수의 구성원이 침묵으로 일관함으로써 집단적 이기주의에 매몰됐다. 이런 자세로 나간다면 KBS2, MBC의 민영화도 정권의 의도대로 성사될 가능성이 높다.

▲ 서울 중구 태평로에 있는 조선일보사와 동아일보사 사옥. ⓒ미디어스
조·중·동 족벌신문은 신문법을 언론탄압법이라고 집요하게 공격해 왔다. 신문법이 신문·방송 겸업 금지를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솔직한 속내는 방송진출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한 술수이다. 집권세력은 신문법 폐지 또는 개정을 통해 이 규정을 없애겠다고 장담해 왔다. KBS2, MBC 민영화와 맞물려 조·중·동에게 두 방송을 나눠준다는 관측이 유력하다. 국회는 한나라당의 지배체제다. 헌법을 개정할 의석을 가졌으니 신문법을 얼마든지 개폐할 수 있다. 설사 야당이 극렬하게 반대하더라도 날치기로 통과시키면 그만이다.

이미 방송통신위원회가 사전 정지작업으로 IPTV, 종합편성채널, 지상파방송의 사업자 자산규모를 3조원에서 10조원으로 늘렸다. 방송법은 방송사 소유한도를 30%로 제한하고 있다. 조·중·동이 대주주로서 중견급 재벌과 컨소시엄을 구성하면 지상파 방송을 인수하는 길이 트인다. 집권세력 내에서 지상파 방송 민영화와 관련한 사회적 마찰을 우려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KBS 사태가 직공법이 더 유효하다는 해답을 줬다. 이명박 정부가 촛불저항 이후 모든 국가현안을 민의를 묵살하고 밀어붙이는 행태에서도 판단근거를 읽을 수 있다.

혹자는 조·중·동이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면서 종합편성채널을 선택할 가능성이 있다고 점치기도 한다. 시청자의 80% 가량이 케이블방송이나 위성방송을 통해 보니 종합편성채널도 지상파방송에 비견할 만한 위력을 가졌다고 생각할 터이니 말이다. 그러나 조·중·동은 20년 전 신문시장에 신참 진입이 허용된 이후 진출한 후발신문들이 기존시장을 깨는 데 실패한 사실을 잘 안다. 후발업자가 기존의 지상파 방송과 경쟁해서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다. 시청률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이니 광고물량은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종합편성채널이 지상파 방송과 경쟁하자면 연간 5,000억원의 생산비를 투입해야 한다. 여기에다 방송은 장치산업이라 투자자금의 회임기간이 길다. 과중한 자금부담 때문에 조·중·동은 KBS2나 MBC를 선호한다고 판단하는 게 옳다. 거액의 투자와 준비기간 없이 기존의 시설·인력을 즉시 가동할 수 있는 이점이 있는 것이다.

집권세력은 지난 10년 동안 KBS, MBC의 편파·왜곡보도로 인해 정권장악에 실패했다고 판단하고 있다. 촛불저항도 그 원인을 KBS, MBC에서 찾는다. 조·중·동이 참여하는 종합편성채널이 제 기능을 발휘하기까지 기다릴 시간이 없다. 당장 바닥으로 떨어진 정권의 지지율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도 방송의 조·중·동화 작업이 시급하다. 정황적으로 판단하면 신문·방송 겸업은 지상파 방송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고 보아야 한다. KBS 사태에서 1차 방어벽이 쉽게 무너지는 것을 목도하면서 자신감을 확인했을 것이다. KBS2 민영화 과정에서 예상되는 구성원의 반발을 이미 점검한 상태인지도 모른다.

▲ MBC노조는 KBS노조와 달리 ‘임전태세’를 유지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 6월 촛불집회가 열리고 있는 서울 여의도 MBC 본사 전경. ⓒ미디어스
문제는 MBC다. MBC노조는 KBS와 달리 임전태세를 갖추고 있어 파괴작업이 용이하지 않을 듯하다. 민영화 저지 공동전선에서 한 쪽이 무너지면 집중포화에 대항하는 조직력의 이완을 어떻게 막느냐 하는 노조의 고민이 따른다. 방송문화진흥원을 민영화라는 방법으로 매각하면 정수장학회가 최대주주로 부상한다. 여기서 정수장학회 전 이사장인 박근혜 의원과의 이해상충을 어떻게 조정하느냐는 정치적 문제가 생긴다. 컨소시엄을 구성한 세력이 연대하면 박 의원은 소수세력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한나라당 내에서 박 의원의 위상, 친이세력과의 반목, 차기대선 구도와도 맞물린 예민한 문제다.

집권세력의 언론정책을 보면 방송장악 없이 정권안보 없다고 맹신하는 듯하다. 방송을 장악해야 여론조작을 통해 정권기반을 강고하게 다지고 정권 재창출도 가능하다고 믿는 것이다. 다시 말해 방송의 조·중·동화를 통해 저항 없이 국정을 기득권층 중심으로 재편한다는 구상일 것이다. 공영방송이 사적자본으로 넘어가는 순간 방송의 가치인 공공성·공익성은 소멸되고 방송의 생명인 정치적 독립성·중립성은 상실된다. 무엇보다도 여론의 다양성 파괴로 인해 민주주의가 위협 받는다. 언론자유는 스스로 지켜야 한다. 내부구성원이 일어서지 않으면 공영방송을 지킬 수 없다. 내부구성원이 싸우지 않으면 외부에서 도울 수 없는 일이다. 언론자유는 싸워서 이기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권리다. 방송 종사자들이여, 방송의 공공성·독립성이 침탈당할 엄중한 사태가 벌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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