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와 체질적으로 맞지 않는 제가 <말레피센트>에 관심을 가진 건 예고편을 수놓았던 안젤리나 졸리의 사악한 포스 때문이었습니다. 그걸 보고 이를테면 "오호라, 이건 디즈니다운 영화가 아닐 수도 있겠군!"이라는 기대를 가졌습니다. 근래 할리우드가 동화를 재해석하는 데 공을 들이고 있으니 <말레피센트>도 색다른 영화가 될 것 같았습니다. 사실 어지간한 고전동화는 다 제작한 디즈니로서는 이제 와서 리메이크 따위를 하느니 차라리 기존과 다른 시각을 가미하는 게 현명한 판단입니다.
<말레피센트>는 우리가 잘 아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에서 공주를 영면으로 몰아넣었던 마녀인 말레피센트를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입니다. 아마 <말레피센트>를 보려는 관객이라면 대부분 이것에 초점을 맞췄을 겁니다. 동화 속 악당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라니, 대체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그릴지 호기심이 동하지 않습니까? 한편으로는 오로라가 아니라 말레피센트를 주인공으로 삼은 게 이상하지도 않습니다. 원작에서 거의 백마 탄 왕자만 기다리는 무력한 여성에다가 비중이 크지 않은 오로라에 반해 말레피센트는 동화 속 악당 중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캐릭터니까요.
하지만 <말레피센트>에서 좋았던 건 그와 같은 캐릭터의 재해석과 안젤리나 졸리의 연기, 그리고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려는 제작의도가 전부였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말레피센트>는 전형적인 디즈니 영화입니다. 자동차로 비유하면 '페이스리프트(부분 변경)' 버전이었습니다. 자동차에는 페이스리프트 모델이라고 해서 기존 모델을 개선하여 발표하는 경우가 있는데, 알고 보니 이게 껍데기만 살짝 바꾸고 달라진 건 하나도 없는 겁니다. 심지어 가격까지 올려 받으면서 그 모양으로 출시하면 고객은 분통이 터지죠. 물론 <말레피센트>는 관람료를 더 받지 않았지만요.
"디즈니답지 않은 영화가 나오는 건가?"했던 바람은 헛된 것이었고 착각이었으며 오해였습니다. 디즈니는 언제나 디즈니로 남을 것이라는 걸 재삼 확인한 게 <말레피센트>입니다. 요정으로 등장한 말레피센트는 도입부만 과거보다 조금 나아졌고 나머지는 결국 철저하게 디즈니다운 캐릭터로 그칩니다. 이게 정말 어리둥절하더군요. 분노에 차서 면전에 대고 저주를 내린 마녀가 밑도 끝도 없이 오로라를 찾아가서 수호천사 노릇을 하고 있다니, 이게 무슨 노처녀 히스테리도 아니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요? 마녀에게도 선천적으로 고운 심성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면 최소한 말레피센트의 내면적인 변화라도 좀 더 성의 있게 다뤘어야 합니다. 그런 과정을 완전히 생략하니 황당할 수밖에요.
<세이빙 미스터 뱅크스> 리뷰를 통해 확인한 것처럼 이젠 디즈니 작품의 필요성을 십분 인정하고 존중합니다. 특히 극 중에서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기 이전에, 불우한 유년시절의 기억에 잠식된 채로 자라도록 만들고 싶지 않다는 의미를 담았던 월트 디즈니의 발언에 큰 감명까지 받았습니다. 단지 제 취향과 디즈니의 작품은 부합하지 않을 뿐입니다. 그걸 인정하더라도 <말레피센트>와 같은 방식의 단순한 이야기 서술과 캐릭터 구현은 반드시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구태여 이분법적인 선악구분이 없어도 거부할 수 없는 마력을 전하는 픽사를 그래서 좋아합니다. <말레피센트>는 차라리 사악하고 표독한 마녀의 행동과 시각을 유지하면서 완전한 재해석을 이뤘더라면 훨씬 만족스런 색깔을 뽐냈을 것 같습니다. 지금이라면 <스노우 화이트 앤 더 헌츠맨>에도 미치지 못하는 재해석에 지나지 않습니다.
★★☆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