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87년 11월 9일, KBS 공채 14기 기자 16명이 ‘KBS의 노태우 후보 여론조작 방송계획’을 폭로했다. 이보다 앞서 같은 해 7월 24일에는 KBS 보도본부에서 이른바 ‘향후 시국대책 방송안’이라는 문건이 발각됐다. 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된 프로그램 편성 방안을 담은 이 각본의 뒷부분이 전하는 내용은 실로 충격적이다. 문건은 유의사항으로 “시국 대책 프로그램과 뉴스보도시 새 지도자 이미지를 기술적으로 간헐적으로 구축하여 여유 있는 인상을 국민에게 심어주는 것”이라 기록돼 있다. 이어지는 ‘주안점’의 내용은 더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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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대 대통령 선거 전 8일 동안 KBS 9시 뉴스에 방송된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세 후보의 유세 보도내용을 분석한 이헌용씨의 논문을 보면, 노태우 후보를 위한 KBS의 편파방송 행태가 여지없이 드러난다. 총 보도시간에서 노태우 후보(41.35%)는 김영삼 후보(29.82%)와 김대중 후보(28.84%)보다 10% 이상 혜택을 입었고, 총 보도시간에서 후보자의 연설이 인용된 시간도 노태우 후보(47%)가 김영삼(27.4%)과 김대중(25.6%) 두 후보에 비해 압도적으로 길었다. 부동층 표심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을 KBS의 편파 왜곡보도는 수치가 보여주는 양적인 편파를 넘어, 화면과 현장음 등 뉴스 제작과정의 이미지 조작을 통한 질적 편파에까지 이르고 있다. 이헌용씨는 논문의 결론을 이렇게 맺고 있다. “뉴스 항목의 배열에서부터 보도량, 전달방법, 보도내용에 이르기까지 공정성, 균형성, 정확성, 안정성 등 보도방송의 원칙을 어느 하나도 지키지 않고 편파·왜곡보도를 했던 것이다.”
1985년 6월 8일에 방송된 <특집기획 광주사태>는 5·18을 다룬 프로그램으로는 지금까지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오래된 자료다. 신민당의 총선 승리로 여소야대 정국이 조성되어 광주 문제가 정치 쟁점으로 다시 부각되자, KBS는 당시 국방장관의 국회 보고 내용을 중심으로 5·18에 대한 악의적인 편파 왜곡으로 얼룩진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5·18을 “우리 내부의 혼란과 분열을 극대화시켜 폭동으로 유도하려는 불순분자들의 계획적인 소행”으로 규정하고, “허무맹랑한 유언비어는 도내 더욱 퍼져 이성과 냉정을 상실한 군중심리가 광주 시내를 휩쓸게 되었다”고 폄하했으며, “난동자들의 무차별적인 만행과 잔학행위”로 점철된 광주 사태는 “그 자체가 국가적 위기였으며 이 위기로부터 국가를 보위하는 데 군이 결정적 역할을 담당했다”고 떠벌리고 있다. 억울하게 희생된 피해자들의 논리와 목소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때를 거슬러 올라가 지난 1980년 8월 22일, 전두환이 대장으로 예편하던 바로 그 날 방영된 <특집방송 전두환 장군의 이모저모>는 아부와 맹종의 언어로 가득한 현대판 용비어천가의 전형으로 남아 있다. 전두환씨를 “부패와 불의에 물들지 않고 청렴 강직한 실천적 인물”이며 “위급한 국가현실을 타개할 용기와 결단”을 가진 “새 시대의 지도자로 추앙받는” 사람으로 묘사한 이 프로그램은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낯부끄러운 갖가지 상찬을 동원해, 민주화를 향한 국민적 염원을 짓밟고 무력으로 정권을 틀어쥔 전두환을 우상화하고 있다.
KBS는 <특집방송-미국이 본 한국의 지도자>(1980년 8월 10일 방송), <특별기획-김대중과 한민통>(1980년 8월 2일 방송), 삼청교육대 문제를 다룬 <카메라초점-순화교육의 현장>(1980년 8월 26일 방송) 등을 잇달아 방영해, 신군부의 출현에 정당성을 부여해준 것은 물론 신군부의 집권과 통치 논리에 철저하게 부역했다. 1985년 집권 민정당의 지지 기반이 흔들리자, KBS는 야당에 압승을 안겨준 2·12 총선을 앞두고 <연속입체기획-여우의 이간질>(1985년 1월 29일 방송), <연속입체기획-잠깐만 생각해봐요>(1985년 2월 29일 방송) 등 실로 기상천외한 총선 홍보용 드라마를 만들어 야당 깎아내리기에 혈안이 된다. 당시 이원홍 사장이 지시하고 안국정 PD가 제작한 이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탤런트 송재호씨는 이후 시청자들로부터 거센 항의와 협박을 받고 출연에도 심한 불이익을 당했으며, 지금도 이 일로 인해 억울하고 죄스런 마음을 갖고 있다고 한다.
전두환 집권 이후 취임일이 돌아오면 KBS는 해마다 <특별기획-국운개척 1460일>(1985년 3월 4일 방송), <특집방송-국민과 함께 달려온 5년>(1986년 3월 5일 방송)과 같은 프로그램을 만들어 전두환 대통령의 치적을 홍보·찬양하는 동시에, <특집방송-삼민투위 그들은 누구인가>(1985년 5월 24일 방송), <보도기획-학원안정법>(1985년 8월 6일 방송) 등을 방영해 민주화의 열기에 찬물을 끼얹고 정권의 무력 탄압 논리에 충실하게 봉사했다. (당시 방송을 만든 장본인들은 지금 현재 특정 정당 소속 국회의원이다.)
프로그램이 얼마나 일방적이었던지 동아일보조차 8월 12일자 신문에서 “분명히 학원안정법에도 반대하는 견해도 있는 만큼 찬반 양쪽 의견을 골고루 수렴하는 것이 보도의 공정성을 잃지 않는 태도일 것이다. 이처럼 한쪽으로 치우친 진행 때문에 모처럼의 이번 보도특집은 설득력을 잃은 느낌이다”라고 논평했다. 이후에도 KBS는 <보도특집-이대로는 갈 수 없다>(1986년 10월 30일 방송), <TV특강-민중민주주의란 무엇인가>(1986년 12월 10일 방송) 등을 통해 운동권을 좌경 폭력주의로 일방적으로 매도하고, AP통신이 1987년 아시아 10대 뉴스 가운데 1위로 선정한 한국의 민주화 시위와 6·29 선언의 의미를 뉴스에서 깎아내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특히 1987년 6월 10일의 KBS 9시 뉴스는 노태우씨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한 민정당 전당대회로 톱뉴스를 시작해 무려 7꼭지를 할애하면서, 6·10 집회는 뒤로 배치하고 주로 피해상황만을 부각시켜 부정적으로 보도했다. KBS 심의실은 이날 뉴스에 대해 “노 후보의 온건하고 합리적인 이미지 부각에 신경을 많이 쓴 것으로 보였으며 보도 방향이 적절하고 바람직하게 보였음”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무서운 건 어떻게든 KBS를 수족처럼 길들여 보려는 정권의 압력이 아니다. 80년대 중반 KBS가 정권의 시녀, 주구(走狗)가 되어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고 왜곡·편파보도를 일삼은 데 항의하며 들불처럼 일어난 시청료 납부 거부운동이 또다시 시청자 국민들을 서울광장의 촛불로 끌어내 가득 메우는 일, 진정으로 두려운 건 바로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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