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보다 더 슬픈 이야기>에서 이보영이 연기하는 크림은 권상우가 연기하는 남자친구 케이가 바로 옆에 누워있음에도 직접 말을 하지 않고 문자로 대화를 건네는 장면이 있다. 옆에 있는 남자친구와 말로 대화하는 것보다 휴대폰이라는 중간 매개체를 통해 의사를 소통하는 것이 더욱 편한 신세대 풍속도가 아닐 수 없다.

사람과 사람이 얼굴을 마주하고 교감하지 못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는 사람이라는 인격체에 대한 부담일 듯하다. 말을 하지 못하는 애완동물이나 애장품에는 각별한 애정을 쏟으면서도 사람을 만나는 것에 대해서는 불안을 감추지 못하는 것 역시 사람을 만남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갖가지 다양한 변수에 대한 불안, 상대방으로 인한 상처를 감수하기가 부담스러운 대인관계에 대한 불안에 기인한다.

아내와 별거 중에 있는 이 남자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 분)는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진다. 처음부터 사랑에 빠지려고 한 게 아니었다. 비서 같이, 일로 시작한 여자 사만다에게 사랑에 빠진 건데, 테오도르가 사랑에 빠진 대상은 인간 여자가 아니라 인공 지능 운영체제다.

인간 여자인 아내와는 별거라는 이별의 수순을 겪지만 반대로 다가오는 사랑의 대상은 인간이 아닌 인공 지능 운영체제이다. 하지만 이 아리러니는 테오도르에게 별 문제되지 않는다. 아내와 있을 때 느끼지 못했던 정신적인 교감을 충분히 나눌 대상을 드디어 찾을 수 있었기에 말이다.

<그녀>는 인간과 교감을 나누는 것보다는 기계라는 사물과 교감을 나누는 것에 익숙한 우리 세태에 대한 알레고리다. 휴대폰을 통해 상대방과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는 것보다 차라리 카톡으로 교감을 나누는 게 더욱 편한 시대를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맞이한 것이다.

카톡으로는 밤을 새서라도 대화를 나누는 이들이 정작 목소리를 통해 대화를 나누는 것에 대해서는 어색함을 감추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사물을 매개로 한 교류에는 익숙하지만 사람과의 직접적인 교류에는 서툴거나 어색한 오늘날의 세태를 영화 <그녀>는 보여주고 있다.

<그녀>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 더 있다. 육체가 없는 플라토닉 사랑이 가능한가 하는 점이다. 인공 지능 운영체제와의 사랑은 정신적인 교감은 가능할지언정 육체의 교감은 불가능하다. 설사 인간 여성이 인공 지능 운영체제의 지시를 받아 테오도르와 사랑을 나눌 수 있다 해도 인공 지능 운영체제와 다른 여성의 육체가 결합된 결과물과 사랑을 한 것이지 인공 지능 운영체제와 온전한 사랑을 한 것이라고는 보기 힘들다.

육체는 배제된 영혼과의 합일만으로 온전한 사랑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와도 직결하는데, 이는 플라톤의 이원론과도 맞닿는 질문이기도 하다. 대상과 직접적인 소통보다는 카톡이나 문자, 휴대폰이라는 기계를 빌려 와야 소통이 편한 현대인의 소통 실태와, 인공 지능 운영체제라는 영혼과의 결합만으로 온전한 사랑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 하는 철학적인 질문을 로맨스라는 외피로 관객에게 묻는 영화가 <그녀>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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