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주(김명민)은 기억상실과 함께 기존에 쌓아왔던 가치관도 잃었다. 그런 그에게 과거의 자신은 너무도 낯설 수밖에 없는데, 그 낯선 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잃어버린 기억 속에서 두뇌 회전만은 여전해서 로펌이라는 환경에 빠르게 적응하려고 해도 과거의 자신은 개자식이었다는 것이 큰 충격이다.

왜 낯선 여자가 자기 얼굴에 침을 뱉는 일부터가 충격이다. 유조선에서 기름이 유출되어 생계가 막막해진 어민들에게 충분한 법적 방어능력이 없음을 파고들어 기업의 이익만 지키려 했던 그 좋은 머리가 이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가치관은 사라지고 상식만 남은 김석주에게 과거의 자신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렇다고 미리 준비한 듯 변화할 수도 없는 것도 괴로울 것이다.

살인누명을 쓴 정혜령(김은서)도 그렇지만 10만 명이나 되는 어민들의 생계가 막막해진 태안 기름유출사건은 김석주가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한계상황으로 양심을 몰아가고 있다. 이제 마침내 김석주는 극단의 변화를 앞둔 상태다. 그런데 그런 김석주를 지켜보면서 문득 뇌리에 전기충격처럼 깨닫게 되는 것이 있었다.

태안기름유출사건이다. 정확히는 삼성 허베이스피릿호 원유유출사건이다. 세월호와 달리 삼성 크레인이나 유조선 허베이스피릿을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 여기서부터 태안주민들의 비극은 시작됐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상 최대, 최악의 기름유출사건으로 어민들은 물론 자원봉사자가 120만 명이나 참여해서 환경오염을 막기 위해, 어민들의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땀을 흘려야 했다. 이 사건이 2007년 12월에 일어났으니 이미 7년이나 지난 지금 기억하는 것은 무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이 사건을 드라마 개과천선이 새삼스럽게 들춰낸 것은 대단한 용기이자 의로운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사건의 배상 판결이 난 것은 드라마에서도 언급된 것처럼 5년이나 지난 후였다. 배상총액은 7천억 대. 얼핏 보기에 큰 금액이다. 그러나 속내를 들여다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 방제비용과 해양복원사업을 제외하면 주민들에게 돌아가는 보상액은 4천억에 불과하다. 또한 피해신고를 한 주민들 중 절반이 넘는 6만 4천 건의 배상이 제외된 것이다.

그리고 이 판결에서 아주 중요한 것은 총보상액 중에서 사고 가해자에 해당하는 삼성중공업에게는 고작 56억 원의 책임만 지게 했다는 것이다. 대신 국민세금으로 2600억 원의 정부보상이 결정됐다는 사실이다. 애초에 이 사건이 삼성-허베이 스피릿호 사건이 아니라 태안기름유출사건으로 합의된 것부터가 잘못된 것이었다. 이번 세월호 참사를 아무도 진도참사라 부르지 않는다. 또한 1995년 여수에서 발생한 시프린스호 원유유출사건도 여수사건으로 기록되지 않는다.

드라마가 거기까지 건드리지는 않고 있지만 적어도 이 사건이 얼마나 엉망으로 종결되었는지에 대한 고발을 하고 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요즘 우리는 서서히 세월호 충격에서 벗어나고 있고, 또 그래야만 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개과천선을 보면서 정말 놀란 것은 이 세월호 참사도 삼성-허베이스피릿호 사건을 태안기름유출 사건으로 바꿔 부르게 된 것처럼 엉뚱한 결말로 간다는 경고가 들렸다는 것이다.

드라마는 이런 사건들을 통해 주인공 김석주의 개과천선을 가리키고 있지만 실제로는 우리 사회의 위험요소가 무엇인지에 대한 통렬한 지적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가 얼마나 빨리 잊어버리는지에 대한 경계를 전하려고 하는 것 같다. 개과천선해야 할 것이 정말 김석주와 같은 나쁜 변호사뿐만이 아니라 너무 쉽게 잊고 사는 우리 자신들이라는 메시지를 보게 된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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