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에서 "폭망이란 이런 것이다"를 처절하게 정의했던 <47 로닌>을 봤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정말 할리우드를 이해할 수 없네요"입니다. <47 로닌>은 일본의 대표적인 민담인 <추신구라>를 바탕으로 한 영화입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춘향전>이나 <홍길동>에 비유할 수 있을까요? 다른 게 있다면 우리나라와 달리 일본에서는 <추신구라>가 끊임없는 인기를 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드라마나 영화로도 이미 수차례 제작된 바가 있습니다. <47 로닌>은 이것을 할리우드가 영화로 제작한 것이지만 그 결과는 최악으로 남게 됐습니다.

국내에선 개봉조차 하지 못한 <47 로닌>의 기본 뼈대는 <추신구라>와 같습니다. 자신이 모시던 주군이 죽음을 맞게 되자 휘하의 사무라이들이 복수를 도모한다는 것이나 캐릭터의 이름도 동일합니다. 그런데 전 <47 로닌>을 보자마자 굳이 이걸 할리우드에서 영화화했어야 했는지부터 의문이었습니다. <47 로닌>은 일본의 전통문화 중 일부나 다름없습니다. 그만큼 일본의 색이 짙습니다. 감독인 칼 린쉬는 그에 대한 깊은 애정과 경외라도 있는 것인지 <47 로닌>에서 큰 도박을 했습니다. 키아누 리브스를 빼면 출연진이 죄다 일본인이라는 것입니다. 키아누 리브스는 혼혈로 사무라이 취급을 받지 못하는 카이를 연기했는데, 이걸 제외하면 <47 로닌>은 숫제 북미에서 개봉한 일본영화에 지나지 않습니다.

설상가상 카이라는 캐릭터는 있으나 마나 합니다. 물론 할리우드에서 제작했으니 관객의 관점에서 일본의 사무라이 정신을 바라볼 수 있는 캐릭터가 필요해서 카이를 넣었겠죠. 에드워드 즈윅이 <라스트 사무라이>에서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용도에 비하면 카이의 비중은 매우 적고, 결정적으로 두 영화의 차이라면 <라스트 사무라이>의 네이선에 비해 <47 로닌>의 카이는 혼자 겉돌고 있다는 것입니다. 전자는 변화하는 시대의 소용돌이에 직접적으로 휘말리고 동참한다면, 후자는 철저하게 이방인의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마지막까지 사무라이 흉내만 내고 있습니다.

결말부에 이르러 다른 사무라이들과 함께 할복을 결행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헛웃음만 나오더군요. 결전을 도모하면서 사무라이 무리의 우두머리가 왜 카이를 합류시키는지에 대한 근거와 타당성도 희박합니다. 일말의 여지랍시고 내놓은 게 주군의 딸과 카이의 로맨스인데, 이것도 충분한 묘사를 배제하고 뜬금없이 절정의 감정을 보이면서 오글거리는 대사나 주고받으니 관객에게 와 닿을 수가 없습니다. 그만큼 막말로 <47 로닌>에 있어 카이는 계륵과도 같은 캐릭터입니다. 빼자니 말 그대로 일본영화를 제작한 꼴이고, 넣자니 대체 어떤 역할을 주어야 할지 몰라서 갈팡질팡입니다.

굳이 CG를 동원한 판타지로 만들어야 했는지도 이해할 수 없긴 마찬가지입니다. (칼 린쉬의 SF 단편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솜씨와 재능을 살리고 싶었던 걸 수도 있겠습니다) 자신들의 전통을 이 모양으로 망쳤으니 <47 로닌>은 일본에서조차 환영을 받지 못하고 망하는 게 당연합니다. 이럴 거였으면 차라리 이야기만 가져다가 할리우드 스타일로 완전히 탈바꿈을 시켜서 각색하는 게 나았겠습니다. 왜 굳이 일본을 무대로 하고 일본인을 대거 등장시키면서도 원전을 판타지로 변형한 데다가 백인 캐릭터를 혼혈이랍시고 등장시킨 것인지 도통 모르겠네요. <47 로닌>과 같은 고집이면 곧 개봉하는 <고질라>도 일본을 배경으로 일본인을 등장시키고 그 사이에 백인 캐릭터 하나 던져주고 제작했겠습니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47 로닌>은 <고질라>의 포스터에 이어 할리우드의 오리엔탈리즘, 특히 일본에 대한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무지몽매한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는 영화인 것 같습니다. <47 로닌>의 경우에는 왜 자충수를 두면서까지 뻔히 폭망을 초래하는 짓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영화 관객 사이에도 인종차별 내지는 선호도가 엄연히 존재합니다. 단적인 예로 타일러 페리의 영화가 흑인의 비중이 높은 북미에서는 인기가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개봉하질 않습니다. <47 로닌>을 바라보는 북미 관객의 인상도 이와 비슷했을 겁니다. 주연이라고 등장하는 키아누 리브스의 비중이 적으니 더 심했겠죠. 충절과 의리라는 사무라이 정신에게 막연한 숭배나 동경 같은 게 있다는 건 알겠는데, 그것이 맹목적이고 무분별하게 표출될 때는 어떤 결과를 맞게 되는 것인지 <47 로닌>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

덧) 출연한 일본배우의 면면은 사실 대단합니다. 사나다 히로유키, 아사노 타다노부, 시바사키 코우, 키쿠치 린코, 아카니시 진 등등. 다만 당연하게도 역시 북미 시장에서의 인지도는 희박합니다. 크게 봐도 아시아에서야 먹히겠죠.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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