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적 공영방송이다. 한 마디로 아수라장이다. 휘몰아치듯 하루가 지나가면 또 다시 예상치 못한 전개가 펼쳐진다. KBS는 지금 한국사회에서 가장 ‘핫’한 취재 공간이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을 교통사고 사망자 수와 비교한 김시곤 전 보도국장의 발언이 알려진 후, KBS를 향한 대중의 불만은 발화점을 넘었다. 8일 안산 합동분향소를 찾은 임창건 보도본부장, 이준안 취재주간은 유가족들의 거센 항의를 받았다. 그날 유가족과 현장의 목소리보다는 정부 발표와 보도자료에 치중했던 보도에 대한 사과를 요구했지만 서울에서는 어떤 ‘사과의 제스처’도 내려오지 않았다. 급기야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은 서울 여의도 KBS 본관을 항의방문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유가족들이 면담을 요구했던 길환영 사장과 김시곤 당시 보도국장은 얼굴 한 번 비치지 않았고, 임창건 보도본부장은 나와서 (김시곤 국장의 발언에 대해) “진위를 확인해 보겠다”고 말했을 뿐이었다. 유가족 대표단으로 KBS 보도국 간부들을 만난 김형기 씨는 “시사제작국장 백운기 기자는 껄껄 웃어요. 우리를 동물원 동물 취급한다. 비아냥거린다”고 울분을 토했다.

유족들이 청와대 앞 항의를 벌이자, 뻣뻣하던 KBS는 180도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8일 밤부터 밤샘 농성을 벌이며 대통령 면담을 요구한 유가족들은 9일 오전 박준우 정무수석, 이정현 홍보수석을 만났다. 그로부터 몇 시간 후인 9일 오후 3시 30분께 길환영 KBS 사장은 “KBS로 인해 여러분 마음에 다시 한 번 깊은 상처를 드린 부분에 대해 진심으로 죄송하다”며 유가족들 앞에서 사과했다. 단, 김시곤 보도국장의 ‘부적절한 발언’에 대해서만 이었다. 그동안 유가족들을 분노케 한 KBS의 보도에 대한 사과는 찾을 수 없었다.

▲ 12일 언론시민단체들은 KBS 보도에 개입해 온 길환영 사장의 즉각 퇴진 기자회견을 열었다. 세월호 참사를 위로하기 위해 건 '당신 곁에 우리가 있습니다' 현수막이 눈에 띈다. (사진=미디어스)

앞서 김시곤 보도국장은 9일 오후 2시, 자신의 발언에 대해 해명하면서 사의를 밝혔고, 본인의 보직사퇴보다 더 어마어마한 내용을 폭로했다. 그는 “언론에 대한 어떠한 가치관과 식견도 없이 사사건건 보도본부의 독립성을 침해해 온 길환영 사장은 즉각 자진 사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년 5개월 간 KBS 보도를 책임져 온 보도국장의 고백이었다. 논란의 ‘발언’에 대해 해명하는 자리를 만들려던 KBS 홍보실 측은 “국장 사견보다는 팩트에 대해 말하라”고 주문했지만 파장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만 상태였다.

9일 밤, 김시곤 보도국장은 KBS 메인뉴스 <뉴스9>와 동시간대에 방송되는 JTBC <NEWS 9>에 나와 “길환영은 대통령만 보고 가는 사람”이라며 “권력은 당연히 KBS를 지배하려고 할 것”이라고 밝혔다. 윤창중 사건을 톱 뉴스로 올리지 말라고 했다는 ‘길환영 사장의 끊임없는 보도 통제’ 사례를 구체적으로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9일 인사발령으로 12일부터는 방송문화연구소 공영성연구부로 출근을 시작했다. 같은 날 아침, KBS는 보도자료로 백운기 전 시사제작국장이 신임 보도국장에 선임됐다고 밝혔다. 사내 게시판에 실명으로 ‘김인규 찬양글’을 올리고 직접 호위에 나섰을 만큼 충성스러운 ‘김인규 키즈’였던 그는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 진행자일 때 자주 ‘편향성’ 논란을 빚었던 인물이다. 백운기 시사제작국장이 신임 보도국장에 오른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밖에서 뭐라고 떠들든지 간에 KBS는 KBS만의 길을 간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가 아니었을까.

대통령 바라보는 사장-사장 바라보는 간부 틀 깨지지 않으면
불행은 언제나 도돌이표

MB와의 유별난 친분으로 언론인보다는 정치인에 가까웠던 김인규 사장은 구성원들에게 ‘최악’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내부에선 ‘이보다 더한 사람이 올까’는 자조도 있었다. 하지만 김인규 체제에서 콘텐츠본부장, 부사장을 역임하며 입지를 다져온 길환영 사장은 기대 이상(?)으로 활약하고 있다. 여권 인사들의 앞마당이 된 <아침마당> 논란, 이승만 특집 강행, 김미화 블랙리스트 파문 등으로 88%의 불신임을 얻어 ‘편파방송 종결자’라는 불명예를 안았던 콘텐츠본부장일 때를 생각해 보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김시곤 보도국장이 폭로한 대로, 그는 철저히 ‘대통령만 보고 가며’ 보도에 개입했고, 때때로 그분의 환심을 사기 위한 이벤트를 벌였다. 절반 이상을 박정희 시대 아이템으로 꾸렸던 <다큐 극장>을 신설하거나, 대통령의 방중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한중 콘서트>를 기획하며 ‘충성’을 보여줬다.

그런 사장을 모시는 간부들은 어떤가. 여기저기에서 사장과 정권을 비호하는 견고한 방어벽이 있다. ‘인규어천가’를 부른 뒤 고속 승진해 센터장 자리까지 오른 사람, 재방송에 가까운 방미 성과 치켜세우기 프로그램을 편성한 사람, 불공정보도로 지탄받는 상황에서 수신료 인상이 웬말 이냐는 비판에 "KBS는 공정성 담보 장치가 실무자 입장에서 봤을 때 너무 많다”고 항변하는 사람, 요즘 KBS 회식자리에선 '수신료 현실화'라는 건배사를 하고 있다고 너스레를 떠는 사람, 국정원의 간첩 조작사건을 다루자 '국정원에게 예민한 시기'라며 불방을 통보한 사람, 현재의 KBS를 부끄러워하고 반성하는 기자들을 ‘사원증 잉크도 안 말랐는데 집단 반발부터 배운다’고 힐난하는 사람 등등. 이틀 전만 해도 문화부장으로 메인뉴스에 나오다가 청와대로 직행해 대변인이 된 이는 대통령 사과를 받지 않았다며 유가족에게 ‘유감’을 표하고 ‘순수 유가족’ 운운했다. 높은 자리 앉으신 KBS 간부들의 업적은 이렇게도 다채롭다.

국민적 공분을 샀던 김시곤 보도국장이 물러난 자리에 들어선 백운기 보도국장도 마찬가지다. KBS의 모든 문제를 압축해 보여준다. 멀쩡한 사장이 불법 해임되고 MB 특보 출신 김인규가 사장을 맡는 동안 KBS에 일어난 많은 변화 중 특히 주목할 만한 지점은 ‘사장 입맛’에 맞는 사람만으로 주요 간부를 채울 수 있을 정도의 편향적 ‘인력 풀’이 완벽히 구축됐단 점이다.

그래서 불행히도 ‘코미디’ 혹은 ‘비극’은 계속될 것이다. 용산참사를 용산사건으로 고치고, 삼성 이재용 부회장 아들 입학비리 특종을 축소시켰으며 최근 세월호 망언으로 국민적 공분을 산 이가 물러나도 그 자리를 잇는 건 어차피 비슷한 부류의 인물들이다. 대통령 특보 출신 사장이 ‘공영방송 KBS’의 수장으로 들어와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KBS 공사 1기 출신인 그가 왜 낙하산이냐’고 반문하며 내부 구성원들의 출근저지투쟁에 맞서 김인규의 ‘출근길’을 뚫어줬던 이가 새 보도국장이 됐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한 KBS 내부 인사는 “김시곤이 커피라면 백운기는 TOP다”고 말할 정도다.

▲ 길환영 KBS 사장과 백운기 신임 보도국장이 물러나면 KBS는 정말 국민의 방송이 될까? (사진=KBS)

이는 KBS만의 불행이 아니다. 옆 방송사 사정도 다르지 않다. 김재철 체제에서 부사장을 맡으며 MBC의 몰락을 주도했던 안광한은 사장이 됐고, 보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였던 ‘허리우드 액션’ 해프닝의 주인공 권재홍 앵커는 지금 부사장이다. 김재철의 입으로 활약했던 이진숙 홍보국장은 보도본부의 총 책임을 맡고 있다. 안광한 사장 취임 이후, 방송문화진흥회에서 본부장급 주요 인사를 결정하던 날 현장에 있던 기자들은 “어떻게 이런 사람들로만 채울 수 있느냐”고 탄식할 정도였다. 한 기자는 “한정된 인력풀에서도 이 정도의 인사를 낼 수 있게 만든 것 자체가 김재철의 유산이다”는 촌철을 남기기도 했다.

길환영 사장과 백운기 보도국장이 물러나면 KBS는 국민의 방송이 될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을 것이다. 두 사람의 퇴진을 외치는 내부 구성원들과 언론시민사회의 바람이 헛되다는 의미가 아니다. 현재의 구조에서 두 사람이 사라진다고 KBS 전체가 달라지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대통령만 보고 가는 사장, 사장만 보고 가는 간부들의 공고한 틀이 깨지지 않는 한 ‘국민의 방송’ KBS는 도달하기 먼 이상처럼 보인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