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젠장, 다시 <국가보안법>을 쓰게 될 줄이야.

2.
시간을 휘저어 2007년 초로 돌아가 보자. <이명박 vs 박근혜>, 그 세기의 대결에서 이명박이 승리할 수 있었던 건 ‘민주화’ 때문이었다(고 나는 믿는다.) 한나라당 불패의 신화를 써내려가던 박근혜 공주가 이른바 당심에서 이기고도 경선에서 진 것은 바로 ‘민주화’ 때문이었다. 독재자의 딸, TK의 맹주 그리고 수첩. 박근혜 대 누군가가 붙는 선거로는 정권을 찾을 수 없다는 평범하지만 혁신적인 깨달음이 당시 분명 있었다. ‘민주 vs 반민주’의 구도. 한나라당이 가장 두려워했던 프레임이었다. 이명박 대 박근혜의 승부는 한나라당의 공포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이명박과 박근혜는 각각 ‘경제, 실용, 수도권’과 ‘’반공, 수구, 영남‘의 대표로 상징화됐다. 결과는, 아시다시피 이명박이 근소한 차로 이겼다.

3.
이명박의 등장은 87년 이후 최초로, 한나라당이 반민주의 외피를 입지 않고 선거를 치를 수 있게 됐음을 의미했다. 정동영과의 본선은 싱거웠다. ‘경제 vs 민주’의 구도에서 ‘대운하 vs 열차’, ‘747 vs 평화경제’의 디테일은 작동하지 않았다. ‘경제’는 <BBK 거짓말>과 같은 상식의 작동마저 멈춰버리는 무서운 것이었다. 결과는, 아시다시피 이명박의 압승이었다.

4.
이명박의 예고된 압승이 던진 충격은 실로 감당키 어려운 것이었다. 갖은 분석과 해설이 차고 넘쳤다. 그러나 그 순간부터 역설적으로 이명박에게 중요해진 것은 승리 그 자체가 아니었다. 이명박의 승리는 그가 박근혜를 이길 때 이미 예정된 것에 불과했다. 이미 예정되었던 승리를 만끽하는 그가 불안했다. 향연을 즐기기엔 그의 앞이 너무 어두워 보였다. 근본적인 문제는 2가지였다. 그는 어쩌다보니 민주화 이후를 상징하는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게 됐고(작업복이 아니라), 죽은 적이 없는 경제를 (삽질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살려내야 하는 운명을 부여받게 됐다.

5.
고약한 운명과 기막힌 행보였다. 이명박을 향한 우리의 꿈 그리고 이명박 정부라는 실체는 아주 조악한 거짓말이었다. 오랫동안 기억하지 못하는 우리의 좋지 못한 기억력이 또 드러났다. 세상은 그대로 놔두어도 민주주의를 향해 진보하는 것은 아니었다.

6.
어떻게 교육의 기본이 ‘영어’와 ‘경쟁’이 될 수 있지? 공적 서비스는 무조건 민간에게 넘어가야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것일까? 식탁의 안전과 재벌의 안녕을 바꿔주면 경제가 정말 살아날까? 아스팔트 위에 섰다는 이유만으로 색소대포를 맞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지. 언론을 장악하기 위한 음모가 음모가 아닌 현실이 되어 방송사에 떨어지고 있는 낙하산들은… 또, 또, 또… 그 모든 질문의 심란한 충격이 강하고 또 지속적이어서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데, 이 모든 것 마저도 또 한 차원 훌쩍 뛰어 넘어 유명 대학의 저명한 대학 교수를 비롯한 7명이 이적단체 구성 등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전격 체포되었다.

7.
그 단체, 나도 조금은 아는 단체다. 그런데 이렇게 ‘조직 사건’이 되어 떠들썩하게 되니 그 이름이 제법 그럴싸하다. ‘사노련’이라…. 왠지 통행금지에 어울릴 법한 작명이기도 하고, 누런 종이에 돋움체로 총총히 박혀있을 문건의 주인일 듯도 싶다. 그런데 아니다. 그런 종류의 ‘사상과 양심의 자유’ 이제 흘러가버린 한 시대의 상상적 낭만이지 않은가. 버젓한 홈페이지가 있고, 촛불 집회에 깃발 들고 참여하고, 단체 명의의 유인물을 돌리는 수준이다. 도대체 왜 그게 뭘? 이적행위라 함은 상대가 있어야 하고, 그 상대의 승자는 너그러움의 겸양을 가져야 한다. 8회말 결정적인 순간에서 평범한 외야 플라이를 놓치고 만 사토 같은 이의 실수가 ‘이적’ 행위이다. 이명박은 ‘친북·좌파’를 압도적으로 이겨버린, 더 이상 북한과의 체제 경쟁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는 시대에, 스스로를 실용 정부라 칭하는 정권의 대통령이다. 그들은 이명박에게 위협이 되지 않고, 정권을 전복할 힘이 없다. 다만, 자본주의에 반대하고, 신자유주의에 반대하고, 비정규직에 반대하는 의견을 가졌을 뿐이다. 지금은 이것을 ‘이적’으로 규정하고 모조리 잡아 가둘 다급한 시대도 비상한 위기도 한가로운 처지도 아니라는 말이다. 차라리 이럴 거면 정권 초 유행했던 댓글 놀이처럼 경제라도 살리란 말이다.

▲ 27일 사회주의노동자연합 탄압을 규탄하는 공동 기자회견 ⓒ사회주의노동자연합
8.
7명이 잡혀갔다는 기사들을 읽으며, 문득 기타노 다케시의 <피와 뼈>롤 봤을 때의 슬픔이 떠올랐다. 오늘의 슬픔은 어제의 현실과 닿아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이 사람이, 그 시절 그때 그 사람으로 살았을 거라는 잔인한 역사만이 반복 될 뿐이다. <피와 뼈>를 보며 어렴풋이 ‘가슴에 돋는 슬픔을 칼로 베어낸다’는 말은 사기라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슬픔은 가슴에 돋지 않는다. 등짝의 멍으로, 왼뺨의 상처로, 절름의 시선으로 <피와 뼈>에 돋는다.

9.
다시, 국가보안법이다. 국가보안법 이건 매질이다. 헌법에 대한 매질이고, 자유주의에 대한 매질이고, 인간의 기본적 권리에 대한 매질이다. 정부가 드디어 원색적으로 아버지의 매질을 하기 시작했다. 이 난폭함이 이명박 시대에 등장했다는 것은 심각한 것이라기 보단 확실히 서글픈 일이다. 국가보안법 이후의 사회, 선진화로 나가자던 썰을 풀던 그였다. 진짜 국가보안법이 맹위를 떨치는 사회로 회귀하면, <사회주의노동자연합>을 했다는 이유로 7명이 체포될 수 있는 사회가 되면 이 따위 글이나 쓰면서 젠체하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것은 물론, 우리가 설명하고 얼추 합의했던 모든 것들을 뒤집어야 한다. 이명박은 박근혜를 이길 필요가 없었고,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역시 고민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 된다. 경제를 살린다는 것은 거짓말이 되고, 실용은 부자유와 동의어가 된다. 우리의 삶은 통행금지가 있던 과거의 어느 때로 돌아가고 만다.

10.
잊지 말아야 한다. 폐에 물이 차서 숨이 막혀 주사기를 꽂고 물을 뽑고 그런데 다시 물이 차고, 또다시 물을 뽑고를 반복했지만 결국, 넘어졌던 그 자리로 돌아가서 다시 널부러지려 하고 있다. 이 정권이, 이 사회가, 이 나라가, 끝끝내 우리의 삶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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