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평(송승헌 분) 대령은 월남전에 참전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운 전쟁 영웅이다. 하지만 월남전의 참상을 잊지 못해 트라우마를 달고 살아야만 하는 인생이다. 하지만 진평과 한 이불을 덮고 사는 아내 숙진(조여정 분)은 남편의 트라우마를 진심으로 염려하고 걱정하지 않는다. 숙진의 관심사는 남편과 정서적 교류를 나누는 것이 아니다.

남편의 군대 내 지위를 발판으로 자신의 지위를 어떻게 하면 굳건하게 만드느냐가 더욱 중요한, ‘지위’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여자가 숙진이다. 아내가 이렇다 보니 진평에게 아내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알맹이 없는 공허한 이야기로만 들린다. 한 지붕 아래 있지만 남편의 아픈 내면을 들여다 볼 줄 모르는 아내와 함께 살다 보니 진평의 정신적인 공허함은 깊어만 간다.

중국 화교 출신 종가흔(임지연 분) 역시 진평처럼 내면이 공허하기는 마찬가지다. 출세를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남편 경우진(온주완 분) 대위와의 결혼 생활은 애정과 헌신으로 결속된 게 아니다. 서로의 배우자에게 결혼이라는 ‘의무’만 있었지 부부의 사랑이라고는 꺼져가는 불씨밖에 남지 않은 두 남녀, 진평과 가흔이 서로에게 끌리는 건 사실 병원 안 인질극을 통해서가 아니다.

결혼 생활에서 결핍을 느낀 두 남녀가 서로를 보고는 같은 부류라는 공통점을, 말은 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서로에 대한 끌림이 싹틀 수 있었다. 만일 이들 남녀가 배우자와 헌신적인 결혼 생활을 유지했다면 진평과 가흔이 한눈에 빠져드는 일은 없었을 테니, 결핍이 잉태한 불륜이 아닐 수 없다.

결핍에 의해 맺어진 이들, 진평과 가흔의 사랑이야기를 다루는 <인간중독>의 서사에서 독특한 점은 성경 속 ‘다윗과 밧세바’를 떠올리게 만든다는 점이다. 다윗의 부하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가 목욕하는 장면을 보고는 연정을 품은 다윗이 밧세바를 차지하기 위해 남편인 우리야를 치열한 전쟁터로 내보내 고인으로 만든 다음 밧세바를 차지한다는 성경 속 이야기는 <인간중독>에서 진평을 다윗으로, 가흔을 밧세바로 유비해서 보면 영화의 동선이 얼마만큼 다윗과 밧세바의 이야기와 가까운가를 알 수 있다. 남편이 있는 가흔이 유부남 진평에게 귀고리를 끼워달라는 부탁은, 다윗을 유혹하기 위해 옥상에서 과감하게 목욕을 해대는 밧세바의 작태와 기시감을 갖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임자가 있는 남편과 아내가 다른 남편과 아내에게 끌리는 영화 속 불륜은, 결핍을 가진 상대방을 첫눈에 알아보고 불같은 사랑에 빠진다는 점에서 영화 제목처럼 중독된 사랑을 보여준다. 결핍이 빚어낸 중독이 아닐 수 없다. 부부관계의 결핍이 아니라면 불륜에 중독될 필연성이 사라질 수 있음을 <인간중독>은 영화 초반에서 치밀하게 보여준다.

진평이 불륜에 중독되어 가지만, 가흔은 불륜에 중독되어가는 자신이 얼마만큼 위험한가를 자각하는 캐릭터다. 진편과의 불같은 사랑이 아무리 달콤하다 하더라도 불륜이라는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허우적대고 또 허우적댄다. 이 점에 있어서는 불륜이라는 중독에 한없이 빠져드는 진평보다, 중독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가흔의 의지력 혹은 자제력이 뛰어나다고 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영화 후반부에 들어서서 이야기가 급작스럽게 돌아가는 탓에 <인간중독>이 <방자전>을 뛰어넘는 작품이라고 보기는 힘들 듯하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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