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1,2회의 김명민은 평소(?)처럼 과도하게 무게를 잡는다 싶었다. 그래서 성미 급한 사람은 김명민의 연기가 변한 게 없다는 말을 참지 못했다. 그렇지만 급한 성미를 탓할 일도 아니었다. 교통사고로 기억상실에 걸려서는 사람이 달라진다고는 했지만 이렇게 변할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개과천선이라는 도덕적인 제목도 함정이었다. 그러나 김명민은 변신했다. 기억상실과 함께 그는 명남이, 익살스러운 무명남이 됐다.
사실 요즘 웃기가 어렵다. 그래서 예능도 가급적 피할 정도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세월호 참사가 준 충격이 워낙 큰 까닭이다. 그러나 명남이로 변신한 김명민의 모습에는 도저히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대놓고 웃기자는 것은 아니었지만 1,2회의 잔상이 사라지지 않은 상태에서 보는 명남이의 행동은 대단히 의외의 웃음과 즐거움을 주었다.
기억이란 어린 시절부터 켜켜이 쌓여진 삶에 의해서 만들어진 현재를 뜻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가 두 가지 얼굴을 갖고 산다고 할 수 있다. 남에게 보이는 얼굴이 하도 굳어서 어쩌면 본인마저도 그 진정한 얼굴을 잊고 살아갈지 모른다. 기억이라는 것은 그 하나의 얼굴을 절대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가두는 강력한 자물쇠일 것이다. 그 기억을 잃었다는 것은 다른 말로 기억에서 풀려났다고도 할 수 있다. 적어도 명남이가 된 김석주는 그러했다.
그러나 김석주가 명남이가 된 모습은 대단히 중요한 모티브다. 개과천선이라고 해서 기억상실과 함께 다짜고짜 정의로워지는 것은 너무 허무맹랑한 일이다. 먼저 기억에 억눌려 있던 김석주의 낭만을 끄집어낸 것은 작가의 지혜롭고도 발랄한 발상이었다. 그러니까 김석주라는 이름을 알려주는데 거기다 대고 “명남이도 괜찮은데”하고 농담을 할 정도의 지나치게 낭만적인 괴짜로 먼저 변신을 시도한 것은 다가올 정의의 아군이 되기 위한 매우 적절한 초석을 제공한 것이다.
요즘 우리는 슬프다. 시간이 꽤 지났지만 아직도 그 슬픔을 거둘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하냥 울고만 있을 수도 없다. 그래도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슬픔에서 일상으로 한 발짝 옮기는 것이 쉽지 않은데, “명남이도 괜찮다”면서 어설프게 웃은 김명민의 미소를 보고 따라 웃으며 슬그머니 일상으로 몸을 기댈 수 있을 것 같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