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경 감독의 영화 <만신>을 뒤늦게야 보았다. 다큐멘터리라고, 그렇다고 극영화라고도 부를 수 없는 이 영화가 굉장히 흥미로웠다. 사실 실존하는 인물, 특히나 직업이 ‘무당’인 인물의 삶의 궤적과 그 직업이 갖는 사회적 의미를 돌아보는 영화가 취할 수 있는 형식이란 그리 다양하지 않다. <만신>은 내레이션과 재연 형식의 삽입 등 우리가 TV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간극장’ 류의 TV 다큐멘터리의 구성을 일부 도입하되, 감독의 예술적 도전과 시도가 섞여 서로 충돌하며 작품의 개성을 강화한다. 관객들의 감정 이입을 위해 얼굴과 이름이 덜 알려진 배우들을 기용하는 것이 일반적인 ‘재연’ 수법이지만, <만신>은 도리어 유명하고 프로페셔널한 배우를 세 명이나 캐스팅해 재연 장면을 구성하며 극영화적 효과를 강조한다.

영화는 그저 김금화라는 개인의 삶을 스크린에 옮기고 해석하는 것을 넘어서서, ‘무당’이라는 존재의 의미를 다층적으로 탐색한다. 여기에는 영화가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바, 일제시대에 가난한 집에서 특히나 여성으로 태어나 해방과 6.25, 군사독재 시대라는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를 거치며 겪은 보편적인 고난과 한의 삶과, ‘무당’이라는 직업을 가졌기에 겪었던 특수한 고난들이 함께 엮이고 포개진다. 사회의 변화에 따라 무속신앙을 대하는 사회의 태도의 변화, 이로 인한 그녀의 사회적 위상과 지위의 변화의 측면도 함께 다루어짐은 물론이다.
그러나 보다 간접적인 차원에서, <만신>은 무당이라는 존재가 지닌 예술적 측면과 사회적 기능의 측면을 함께 아우른다. 그리고 이 부분이 <만신>을 더욱 흥미롭게 하는 부분이다. 예컨대 재연하는 배우, 즉 김새론, 류현경, 문소리를 통해 재연되는 실존 인물, 즉 김금화와 한 프레임에 함께 등장시켜 김금화로 하여금 자신을 연기하는 배우를 바라보게 하는 신들이 그렇다. 이 신은 영화의 후반에서 무당이 주관하는 굿의 예술적 기능, 특히 공연예술적 속성이 강조되는 맥락과 맞물리면서 실재와 재현, 역사와 픽션, 삶과 예술의 경계를 흩뜨리고 다른 위치에서 새로이 긋는다.
17살에 신내림을 받고 고작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나이에 한국전쟁을 겪었던 김금화는 전쟁 시기 북한군과 국군 양쪽으로부터 목숨의 위협을 받았다. 특히나 새마을운동이 전국 단위로 조직되었던 군사독재 시대에는, 정부는 물론 사회의 새로운 근간이 된 기독교로부터 동시에 박해와 탄압을 받았다. 80년대 전두환 정권 하에서야 그녀는 비로소 일종의 타협의 지점에 서게 된다. 이는 정권의 정통성이 약했던 전두환 정권이 전통문화와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장려한 결과이기도 했고, 이 기회를 김금화가 잘 ‘활용’한 덕이기도 했다. 무속이라는 전통문화의 계승자이자 수행자로서의 김금화와, 굿의 공연예술적 속성을 극대화한 엔터테인먼트 – 예술 산업에서 배우로서의 김금화의 존재는 더욱이 미디어를 등에 업고 그 사회적 위상의 면에서 극적인 반전을 이루어낸다.
그녀는 주요무형문화재로서 매스컴을 통해 유명한 ‘스타’가 되었고, 자신의 영향력과 미디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굿’을 일종의 ‘공연예술’로 무대에 올리고 어필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 장면에서 내레이션은 이렇게 지적한다. “매스컴이 김금화를 이용한 것인지, 김금화가 매스컴을 갖고 논 것인지 구분되지 않는다. 미디어는 김금화가 사용했던 무수한 무구들 중 하나가 되었다.”
만약 개봉 즈음에 영화를 봤다면, <만신>은 내게 그저 ‘흥미롭고 특이한 영화’에 불과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세월호가 침몰하고 패닉과 깊은 우울과 분노에 휩싸인 상태로 보았고, 이 패닉과 우울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영화를 되새기며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여전하다. 이것은 이제 이 영화가 내게 이 비극과 함께 각인되었다는 것, 앞으로 이 영화를 되새길 때 필연적으로 이 참사와 연결된 이미지로 떠올리며 감독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의미를 이 영화에 부가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것은 사실 영화의 흔한 숙명이기도 하다. 영화는 영화제작사가 최종 완성 프린트를 뽑아낸 순간이 아니라, 관객이 각자의 주관과 감정과 개인의 맥락에 따라 해석하고 그 해석을 다른 이들과 공유하며 논쟁할 때 완성된다. 이러한 감상과 해석은 그 관객이 그 영화를 볼 때 어떤 시간적 맥락에 있었는가뿐 아니라, 어떤 공간에서, 어떤 환경에서 보았는가에 따라서도 영향을 받는다. 그런 면에서, 영화의 후반, 풍어제를 지내는 장면이 유난히 내 눈에 깊이 새겨진 것,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마을 전체를 조감하는 버즈아이즈 숏에서 마을 세트가 거대한 배 모양으로 보인 것은 그리 특이한 일도 아니다.
인천 앞바다 배 위에서 펼쳐지는 서해안 풍어제의 배연신 굿은 한동안 명맥이 끊길 뻔하다, 김금화가 대표로 있는 전통굿 보존회의 노력으로 다시 재개되었다. 영화는 자료 화면의 삽입을 통해 2012년 풍어제를 지내는 장면을 꽤 길게 보여준다. 화려한 원색의 무복을 입은 김금화가 풍어제를 주관하고 그의 신딸과 신아들들이 굿을 보위한다. 고기잡이 배의 만선과 풍요를 기원하는 굿은 그저 복을 기원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바다에서 사라져간 목숨과 인연들을 위로하고 추모한다. 김금화는 남자 무당과 함께 각각 영산 할아밤과 영산 할맘을 ‘연기’하며 일종의 마당놀이 극과도 비슷한 굿을 펼친다. 풍랑으로 헤어진 부부가 오랜 시간이 흘러 노부부가 되어 어렵게 재회한다는 설정인데, 한 사람은 배의 선장이, 한 사람은 무녀가 돼 있다.
그러나 배의 선장이란 어쩌면 바다의 귀신이기도 할 터. 진혼굿은 망자의 넋을 달래지만 곧 산 자들, 죽은 이의 가족들을 위무하는 것이기도 하며, 산 자들의 풍요를 기원하는 굿은 필연적으로 망자들을 위로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리고 이런 위무와 추모에는 필연적으로 음식과 음악, 춤과 연기와 공연이 수반된다. 우리가 애도의 공간에서 금기시하는 원색의 복색까지. 우리가 전통적으로 슬픔과 상실을 달래던 방식은 바로 이렇게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예술 형태를 갖춘 것이었으며, 이 거대한 위로의 제의는 심지어 일종의 ‘잔치’라는 형식을 띠고 있기도 하다.
무속신앙을 몰아냈던 근대 국가의 이념과 이성이 무속신앙을 양지화하여 근대국가와 공존하도록 ‘전통문화’라는 한정된 영역의 ‘타협지대’를 만들었을 때, 여기에는 암묵적인 역할 분담에 대한 합의가 있다고 가정할 수 있을 것이다. ‘전통문화’라는 허락된 공간 안에서 무속은 ‘신앙’의 면을 거세당한 대신 문화와 공연이라는 예술 형태로 살아남았다. 아무리 우리가 자본주의에 침윤된 근대 국가와 이성의 무기력과 무능력을 생생하게 목격하고 있다 하더라도, 근대 국가와 제도가 역할을 발휘해야 할 영역에 종교나 무속이 주는 위안을 성급하게 아로새기는 것은 분명 위험한 일이다.
그러나 근대 국가와 제도의 영역이 아닌 부분들, 과거 종교와 무속과 신앙의 영역이었고 근대 이후 예술이 일정 부분 역할을 담당하게 된 영역들은 여전히 구분된 채 남아 있고, 국가와 제도의 힘이, 혹은 이 제도의 힘을 함부로 호출하여 이러한 예술의 영역에 금지를 명령/시도하는 것 역시 매우 위험한 일이다. 우리는 인류사를 통해 우리가 쌓아온 지혜들, 그리고 예술들을 통해 망자와 망자의 가족들, 생사를 알 수 없이 여전히 돌아오지 않고 있는 이들, 그리고 이들을 보며 깊은 슬픔과 우울에 빠져 있는 우리 자신들을 서로 위로하고 격려할 의무와 권리가 있다. 이 기회마저 서로에게서 앗아간다면, 그것이야말로 산 자들을 유령의 터 안에 가두는 것이 아닐까.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