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원행동’의 사장출근저지 투쟁이 시작된 첫날 아침인가? 본인 스스로의 판단오류를 먼저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공영방송 수호, 미디어 공공성 사수가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한미자유무역협정 이후 신자유주의 자본국가는 KBS와 MBC를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 보존을 위해 그 대의에 동의하는 모든 세력들과 정파적 이해관계를 뛰어넘어 일시적으로라도 연대하고 제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권력에 대항하기 위한 세력 결집을 위해서라면 이전의 대립을 풀어내고 불신을 해소하는 노력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봤다. YTN, 언론재단 등을 포함해 방송뿐만 아니라 신문, 인터넷 등 매체 전 분야에 걸쳐 그 예상된 권력의 운동이 시작되었을 때, KBS 노동조합과의 대화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 KBS본관에 걸려있는 노조 명의의 '낙하산 사장 반대' 걸개그림ⓒ미디어스
현 집행부가 시작되었을 때, 이 비상한 사회적 위기 상황에 왠 ‘복지대박’이냐고 분개해 칼럼을 썼던 기억이 난다. 바로 그 KBS 노동조합을 상대로 대화의 카드를 꺼내고 제휴의 프로포즈를 내놓으니, 많은 분들이 어리둥절해 하고 심지어 공개석상에서 유감과 비판의 목소리를 지르는 것도 당연한 일. 당신 왜 그래? 없는 자리에서는 얼마나 더 많은 비난이 오고갔을지 눈에 선하다. 함께 힘을 모아 싸워야 하지 않나요? 함께 싸울 수 있는 길을 찾는 것도 운동의 일환이지 않을까요? 함께 싸울 수 있는데 굳이 마다할 필요는 없지 않나요? 힘을 모으지 않고 큰 싸움에서 과연 이길 수 있을까요? 이념의 차이를 인정한 상태에서의 공영방송 사수, 미디어공공성 수호의 공통전선은 불가능한 것인가요?

그런 심정을 바탕으로 시작했고, 지난 칼럼에서는 마지막 콜을 부른 것 같다. 함께 갈 것이냐, 아니면 결별한 것인가? KBS 노동조합을 압박하고, 박승규 위원장에게 재촉했었다. KBS와 공영방송의 미래를 좌우할 가장 중요한 며칠의 시간을 앞 둔 상태에서, 전열을 분명히 해야 했기 때문이다. 권력의 대변인과 대행자들이 야음을 틈타 전력을 확인하고 전술을 변경할 때, 사회적 역능의 대의주체 또한 민주주의와 자유표현, 공적언론의 농성을 위해 결의를 확실히 다질 필요가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이어져 온 대화의 실마리를 완전히 놓지 않으려는 미련으로, 급박한 상황에서 도움을 구하는 다급함으로, KBS 노조의 결단을 촉구했다. 이후 위원장의 행보를 조바심 나는 마음으로 지켜봤다.

최근 며칠의 상황에 대해 상술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KBS를 장악하고야 말겠다는 정치권력의 의지가 한 번 더 분명해졌다. 의지관철을 위한 음모와 야합의 움직임들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공영방송을 좌지우지할 권력 4인방의 회동이 충격적으로 폭로되었다. 더욱 엽기적인 것은, 그럼에도 어떤 멈칫거림 없이 진행되는 사장 만들기의 프로세스다. 순식간에 추천이 이루어지고 선임이 결정되고, 그래서 소위 KBS 출신 사장의 시대가 개시된다. 같은 날 여당 정치인은 MBC사영화 카드를 다시 노골적으로 꺼낸다. 새삼 놀랄 것 없는, 공영방송해체와 민주언론장악 프로그램의 결정적 고비다. 완료되지 않은 KBS 불안의 진행 상태이며, 공영방송 위기의 팍팍한 내일이 저 너머 훤하게 내다보인다.

KBS의 정치적 독립과 공영방송 수호, 미디어공공성 사수의 투쟁도 중대한 시점에 이르렀다. 바로 이 결정적 순간에, KBS 노조는 나의 신뢰를 무너뜨리고 또한 주위의 기대를 저버리고 정확하게 커밍아웃했다. 가장 중요한 순간에 자신의 본색을 드러내 버린 것이다. 어처구니없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배신감을 감출 수 없다. 안일한 본인의 판단력에 깊은 회의를 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런 순진함 혹은 무지함으로 어떻게 운동 판에서 계속 버틸 수 있을지 심한 자괴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다만 개인적 아픔쯤이야 자업자득이라 넘길 수 있겠으나, KBS노조의 오판이 (언론)노동조합운동과 미디어언론운동에 남긴 해독, 공영방송과 민주주의 역사에 끼친 폐해, 시청자들의 신뢰에 미친 상처는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

▲ 8일 분노한 KBS 구성원들이 본관 민주광장에 모여 집회를 열고 있다. ⓒ윤희상
정당성을 상실한 이사장의 퇴진과 절차적 민주주의를 위반한 이사회 저지의 행동을 약속하지 않았던가? KBS의 정치적 독립성을 심각하게 훼손한 이사장과 권력을 위한 거수기로 전락한 이사회를 맹비난하지 않았던가? 권력 4인방과 사장후보들의 야간면담에 대해서는 또 어떤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던가? 이사회 개최를 저지하기 위해 이곳저곳으로 쫒아가고, 삭발하며, 총파업을 투표를 하고. 그렇게 KBS의 정치적 독립과 ‘낙하산’ 반대의 입장을 이번에 반드시 관철시키겠다고 호언장담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돌연 새 사장 임명자는 낙하산이 아니고, 이사회 결정을 거부하는 것은 무정부적인 태도라굽쇼? 파업을 철회한다고요? 이제는 ‘치유’와 ‘안정’이 필요하다고요?

사장으로 뽑힌 자가 KBS 출신이라, 그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가? 세 가지를 짚지 않을 수 없다. 첫째, ‘사장추천위원회’는 어떻게 되었는가? 애당초 시민사회와 대화를 시도할 때 가장 중요하게 언급되던 내용이다. 시민사회와 시청자를 포함하는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사장선임의 절차를 만들어내고, 이를 통해 좋은 사장을 뽑자고 했다. 그런데 이제 와 이 카드를 무시한 채 일방적으로 이루어진 권력 중심의 사장선임 과정과 그 결과를 KBS노조가 인정하겠다고 한다. 민주적 시스템과 반대되는, 말 그대로의 밀실 속 그들만의 절차를 승인하겠다는 것인가? 말과 행동이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비극적으로 보여줄 심산인가? 번지르르한 수사로 도저히 감출 수 없는, KBS 출신이면 OK라는 궤변의 코미디.

둘째, KBS 이사회를 비판하지 않았던가? 그 개최를 반대하지 않았던가? 이사회가 비정상적으로 운영된다고 의심하고, 민주적 토론의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 아닌가? 이사장이 권력과 채널로 비밀리에 사전 회동하고 있기에, 야당추천 이사들이 사실상 참가 보이콧을 한 상태이기에, 이사회가 사실상 외부에 의해 결정된 카드를 선택하는 도구로 전락했기에, 개최를 막은 것 아닌가? 권력이 결정한 카드를 선택하는 어용기구를 거부하지 않았나? 그런데 이제와 갑자기 그 거수기를 민주적 토론기관으로, 그 결정을 합리적 선택으로 받아들이겠다고? 이사회를 실체적 기구로 인정하자고? 무슨 초딩들도 기겁을 할 논리모순인가? 무지 탓인가, 아니면 KBS 출신이면 어째도 OK라는 본심을 까는 것인가?

셋째, 새로 사장으로 임명된 이병순씨는 ‘낙하산’으로 볼 수 없다는 궤변을 펼쳤다. 솔직히 그가 누구인지 잘 모른다. 그가 어떤 생각으로 나섰는지는 더욱 알 길이 없다. 그렇지만 그가 권력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떠나, 이미 그는 사장으로서 자격상실이다. 권력이 자신의 입맛에 맞춰 결정하는 판에서, 권력의 시녀로 전락한 이사회를 통해, 김인규 등 이미 낙점된 인사들이 여론의 압박 때문에 기각된 상황에서, 그래도 여전히 권력에게 충실할 수 있는 최선의 카드로서 선택된 자이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절대 독립적일 수 없고, 그래서 KBS의 공정성과 공익성을 결코 담보할 수 없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권력이 차차차선으로 내민 무리수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혹은 차차차차차선으로...

▲ 유재천 이사장의 요청으로 KBS본관에 투입된 사복경찰들.ⓒ윤희상
그런데 그 무리(無理)수를 ‘일리(一理)’도 아니고 합리적이라 주장하는 건가? 오직 그가 KBS 출신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가 권력의 이익에 앞서, 혹은 그와 함께 KBS 식구들을 더 챙겨줄 것이라고 기대하는가? ‘복지대박’은 아니더라도, 그가 구조조정을 보류하고 일자리를 지켜줄 수 있다는 기대감의 표식인가? 그런 방향으로 타협할 수 있다고 낙관하나? 절차나 과정은 전혀 문제가 안 되고, 오직 자기에게 유리한 결과만 중요하다는 식의 반민주주의 외에 다른 어떤 것으로 도무지 설명되지 않는다. 애당초 그러했는지, 아니면 지금 와서 그렇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런 비상식적 논리와 비민주적 태도로는 KBS 내부의 합리적 구성원들은커녕 외부 상식적 시민들을 도무지 설득할 수 없다.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것은 현 노조 집행부의 수구 보수적 실체, 이기적 속성, 기회주의적 본질을 강화할 따름이다. 한마디로 구차하다. 당장 말을 접으라. 더 큰 잘못을 저지르기 전에, 서둘러 반성하라. 냉정한 성찰의 시간을 가지라. 모르면 안팎에서 배우라. 만약 그래서 옳지 않은 판단을 깨우친다면, 바로 광장에 나가 잘못을 고하라. 바른 행동으로 책임지라. 그러지 않으면, 대화의 파트너는커녕 당장 적대의 목표점으로 전락할 것. 분명히 경고한다. KBS 구조조정이 촉진되고, 사장이 그 지휘자로 맹활약하며, 양심적 세력들이 징계를 받고, 비판적 목소리가 제압되고, 공영방송체제가 해체되고, 그때 뭐라 떠들어도 싸늘한 시선만 돌아올 것이다. ‘이봐, 너희들은 그때 뭘 하고 있었지?’ ‘너희들은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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