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비의 <반란의 도시>(데이비드 하비, 한상연 옮김, <반란의 도시>, 에이도스, 2014)를 읽었다. 이 책은 사유화와 소유권 너머로 실종된 ‘도시권’을 복원하고, 이를 급진적으로 주장하기 위한 시도이자 제안이다.

도시권은 우리에게 낯선 단어다. 하지만 도시를 공간과 기능적 배치로 한정시키는 사고에서 벗어나, 도시에 거주하는 인간과 행위를 포괄하는 총체로 이해하여 구성원들에게 권리를 부여하려는 시도는 그리 낯설지도 이상하지도 않다. 이를테면 ‘탑골공원’은 공원이라는 공간과 더불어 그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노인들 그리고 그들의 행위와 분리하여 생각하기 어렵다. 같은 이유에서 홍대거리는 홍대거리의 사람들과 행위,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발현된 독특한 분위기와 분리하여 사고하기 어렵다. 공간은 단순히 지역으로 표상되는 것이 아니라 공간과 배치, 구성원과 행위의 집적체로 현전하고 존재한다. 이러한 전망을 확장하면 도시를 거주자들이 만들어내는 공간과 배치와 행위의 총체로 바라보는 도시권의 전망에 도달하게 된다. 이런 시각으로 바라보면, 도시권의 성격을 사적인 것이 아니라 공적인 것으로, 개인의 것이 아니라 공동의 것으로 규정할 수 있다. 이것이 <반란의 도시>가 전제하는 개념이다.
하비가 밝히고 있듯이, 도시권은 본래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르페브르가 제시한 것이다. 르페브르의 <도시에 대한 권리>가 번역되어 있지 않아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없지만, 강현수의 책 (강현수, <도시에 대한 권리 - 도시의 주인은 누구인가>, 책세상, 2010)을 참조하면 르페브르가 여러 측면에서 도시권을 조망하고 다양한 권리(작품에 대한 권리, 전유의 권리, 참여의 권리, 도시 중심부에 대한 권리, 차이의 권리와 정보의 권리, 도시 거주자의 권리 등)를 부여하려 한 것을 알 수 있다. <반란의 도시>는 이와는 약간의 차이를 보이는데, 르페브르의 구상을 계승하되, 재생산의 측면에서 자본과 도시의 관계를 고찰하고 이를 통해 도시권이 사적소유와 자본의 잉여수익으로 환원되는 현상을 비판, 자본의 재생산을 끊을 수 있는 도시권의 역할과 가능성에 대해 제시한다. <반란의 도시>는 르페브르의 주장을 혁명적 관점에서 전개하는 저작이다.
도시 공간의 (재)형성과 자본의 재생산
하비에 따르면 도시 공간의 (재)형성과 자본의 재생산은 다음과 같은 패턴을 따른다.
1) 자본주의의 전개로 인해 미사용 과잉자본과 과잉노동력이 증가하여 위기를 맞는다. 2) 이를 해결하기 위해 도시 공간의 (재)형성이 강제 시행되고 3) 새로이 형성된 공간을 통해 과잉자본과 실업문제가 잠시 해결되지만 4) 도시를 재형성한 금융시스템과 신용구조가 과잉 팽창하면서 투기로 이행하고, 거품이 꺼지면서 파탄난다.
하비는 제2제정기의 파리를 이 패턴의 역사적 사례로 든다. 1848년의 공황은 미사용 과잉자본과 과잉노동력이 불러 온 공황 중 하나였으며, 나폴레옹 3세는 정치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과잉자본을 해소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정책으로 삼아 ‘조르주 외젠 오스만’에게 파리를 재편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오스만은 자신의 임무가 ‘도시 공간의 형성’이라는 수단을 통해 ‘과잉자본’과 ‘실업문제 해결에 기여해야 한다’는 것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오스만은 당초 상정된 도시 형성의 규모를 대폭으로 확장했으며 조금씩 고쳐나가기 보다는 전면적으로 뜯어고치는 방식을 채택했다. 이는 막대한 규모의 예산을 필요로 했으며, 예산은 모두 ‘부채’로 조달했다. 그리하여 파리는 우선 과잉자본 문제를, 다음으로 실업 문제를 해결하면서 잉여를 생산, 흡수하는 공간적 해결책으로 변모한다.
“파리는 빛의 도시가 되었고, 소비, 관광, 쾌락의 일대 중심지로 변모했다. 카페, 백화점, 패션산업, 대형 박람회등은 조야한 소비주의(전통주의자를 분노하게 만들고 노동자를 배제한 소비주의)를 자극해 잉여를 흡수했고 생활양식을 확연히 바꿔놓았다.” (p33)
그러나 도시를 재편했던 금융시스템과 신용구조가 과잉 팽창하면서 투기로 변했고, 결국 1868년 파탄나고야 말았다. 즉 과잉자본을 해소하는 수준을 넘어 경쟁원리에 따라 투자가 증폭되고 가치를 부풀리면서 거품으로 이행했던 것이다. 결국 독일과 전쟁을 벌인 나폴레옹 3세는 비스마르크에 패해 실각했고, ‘파리코뮨’이 일어났다.
이러한 패턴은 거대한 규모로 반복한다. 하비는 1942년 뉴욕에서 시작된 미국 대도시 재편성 프로젝트와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영국, 아일랜드, 스페인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의 부동산 시장 붐과 멕시코시티, 산티아고, 뭄바이, 요하네스버그, 서울, 타이베이, 모스크바 그리고 유럽 각지에서 일어난 건설 붐까지 모두 동일한 원리에서 작동한다고 밝힌다. 이러한 공간 재편성과 과잉자본 해소의 움직임은 자본이 범지구적인 조건에서 움직이며 지역과 거주민의 삶을 파탄시키고 있음을 뜻한다. 자본은 전 세계의 도시를 집어 삼키며 자신을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도시 형성 과정에서 일어나는 배제와 착취의 메커니즘
저자는 자본에 의한 도시 공간의 (재)형성은 비슷한 결과를 낳는다고 지적한다. 공동체적 삶의 방식에서 사적인 소유권이 지배하는 삶의 방식으로 이행, 가난하고 정치적으로 소외된 이들의 공간과 삶이 가장 먼저 박탈당하고 토지가 강제 수용되는 양태, 도시공간에 새겨지는 단절과 계급화(타워펠리스와 ‘단지 밖’ 다세대 주택촌), 화폐를 매개로 한 비인간적인 서비스 생산의 심화 등이다.
그러나 하비가 좀 더 천작하는 문제는 총체물로서의 ‘도시’에서 삶이 박탈되고, 재편성의 권리가 자본에게 주어지며, 재편성의 이익이 거주자의 삶으로 되먹임 되지 못하고 자본과 부동산 개발업자의 이익으로만 환원되는 현상을 비판하는 것에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도시가 공간과 기능적 배치만이 아니라 거주자나 구성원의 행위와 삶의 양태를 망라해 형성되는 것이라면 이것이 지대와 개발 이익으로만 환원되는 것은 소유 관념으로 생각해도 온당하지 않아 보인다. 다시 말해 강남역에서 막대한 임대수익을 올리는 재건축 건물의 주인과 개발업자, 개발비용을 빌려준 금융업체의 이익은 강남역을 구성하는 구성원의 행위와 성향 또는 양태에 막대한 빚을 지고 있음에도, 그것에 어떤 대가도 지불하지 않는 것이다. 더불어 거주자는 공간에 거주하면서 ‘도시’를 형성했던 삶의 양태를 가치로 인정받지 못하고, 재개발을 용인/거부하거나 원하는 형태로 구성할 권리를 거부당한 채 (재)개발이라는 명목 앞에 간단히 쫓겨난다. 하비는 공간의 형성이 지닌 배제와 박탈의 측면을 언급하면서 엥겔스의 텍스트를 인용한다.
“(...) 도심지역에 들어선 건물은 시간이 흐르면서 토지의 가치를 높이기보다는 떨어뜨린다. 이제 그런 건물은 철거 되고 다른 건물이 세워진다. 도심 지역에 위치한 노동자 주택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 아무리 인구가 과밀한 지역의 노동자 주택이라 해도 임대료는 일정한 최고한도를 넘어서 상승하지 못한다. 설령 상승한다 해도 그 속도는 매우 완만하다. 이제 이런 노동자 주택이 철거되고, 그 자리에 점포, 상품창고, 공공건물이 들어선다.” (p48~49 )
인용문은 건물이 재개발되면서 권리금도 돌려받지 못한 채 10년간 꾸려왔던 가게에서 300만원을 받고 쫓겨나는 한국의 사례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도시 (재)형성은 권리와 소유의 차원에서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약탈에 가까운 이중의 탈취 과정 또한 존재한다. 하비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미국 서브 프라임 사태를 서술한다.
“금융위기가 발생하기 전 미국의 저소득 흑인 주민은 이미 약탈적 서브프라임 대출 탓에 710억 달러에서 930억 달러에 달하는 자산 가치를 잃었을 것으로 추산되었다.(...) 2001년 이후에 닥친 파도와 궤를 같이 하여 월스트리트의 보너스와 주택 담보대출 관련 산업의 보수는 순전한 금융 조작, 특히 고수익 고위험 주택 담보대출의 증권화와 연관된 금융조작을 통해 전대미문의 수익률을 올린 덕분에 하늘 높은 줄 치솟았다. 이때 다양한 숨은 경로를 매개로 빈곤층에서 부유층으로 막대한 부가 이전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말이 많았던 문제의 차별적 서브프라임 주택 담보대출은 일종의 역 레드라이닝(저소득층에게 대출을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 대출 대상자로 삼은 것_옮긴이)으로, 흑인 가구나 단독 가구(여성이 세대주인 가구)를 겨냥해 통상적 대출이 아니라 서브프라임 주택 담보대출을 받도록 유도하는 수법이었다. (...) 만약 이자율이 높아져 원금 상환액과 늘어난 이자를 감당하지 못해 한 차례라도 연체하는 경우에는 주택 할부 구입계약이 무효가 되어 흑인 가족은 집에서 쫒겨났다. 이런 관행은 당연히 물의를 일으켰다. 악덕 부동산 소유자를 대상으로 공민권 소송이 제기되었으나 패소로 귀결되기 일쑤였다. (...) 볼티모어에서는 최근 600만 달러에 상당하는 부동산 유치권을 시 당국이 소규모 변호사 그룹에게 매각한 일이 있었다. 변호사 그룹은 이 거래를 통해 매입액의 250퍼센트에 달하는 이득을 거두었다. 만약 유치권을 청산한다면 그들은 상당한 부를 쌓을 수 있다. 또한 유치권을 이용해 부동산을 손에 넣어도 이득을 거둔다. 미래에 개발되면 높은 가치를 가질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p103~108)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다. 과잉 축적된 자본은 정치권력에 압력으로 기능한다. 정치권력은 원주민을 쫓아내고 공간을 (재)형성한다. 이때 자본은 ‘부채’의 형태로 개발자금을 조달하면서 막대한 잉여수익을 창출한다. 그 후 ‘금융 조작, 특히 고수익 고위험 주택 담보대출의 증권화와 연관된 금융조작’등을 통해 가치를 부풀리고 거품으로 이끈다. 이 때 ‘무차별 담보대출’을 통해 가난하고 정치권력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대상으로 이자소득을 거둔다. 그 후 거품이 붕괴되고 금리가 올라가며, 동결된 실질임금 탓에 사람들이 이자를 내지 못하면 가차 없이 부동산을 압류해, ‘매입액의 250%에 달하는 이득을 (또 한 번) 거둔다.’ 하비는 현상을 기술한 뒤 다음과 같이 잘라 말한다.
“내가 말하고 싶은 핵심은 수많은 대도시에서 취약계층을 상대로 착취와 약탈이 끊이지 않고 자행된다는 것이다. 노동자가 자본가와 싸워 실질임금을 얻어냈다 해도 소비 영역에서 벌어지는 착취 활동이나 약탈 활동을 통해 자본가는 그만큼을, 아니 그 이상을 손쉽게 도로 가져간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게 대단히 중요하다. 도시에 거주하는 저소득층 주민 대다수는 노동을 과도하게 착취당하는 것도 모자라 빈약한 자산마저 약탈당하고 있다.”(p109)
다시 말해, 도시는 어떤 형태로든 자본의 재생산에 기여한다는 것, 그리고 자본은 공간을 형성하면서 도시에 내재한 유형무형의 가치를 소유권에 귀속시켜 끊임없이 이익을 뽑아내고 종국에는 가장 가난한 사람마저 무자비하게 쥐어짠다는 것이다. 결국 지대를 형성하는 착취형태는 “약탈에 의한 축척의 영역을 구성한다는 점, 그리고 약탈에 의한 축척을 통해 화폐는 금융 시스템 내부에서 형성된 막대한 부를 떠받치기 위해 의제자본의 유통과정으로 흡수”(p102)되어 자본을 재생산하는 메커니즘을 완성하는 것이다.
도시권을 통해 자본 재생산의 악순환을 정지시키자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일까. 이제까지 살펴보았듯이 자본이 재생산되기 위해서는 도시 공간의 형성이 필수적이었다. 그러므로 도시는 잉여가 생산되고 축적되는 계급현상이자, 계급이해가 극심하게 상충하는 투쟁의 장이 된다. 그러므로 하비가 제안하는 것은 거주자와 구성원의 집합적 총체로서의 ‘도시권’을 복원(또는 재발명)하여 도시를 하나의 공유재로 삼는 것이다. 그리하여 도시권을 공동의 민주적 통제 아래에 놓아 도시의 교환가치를 폐기하고 사용가치를 극대화시켜 사적 소유권을 철폐, 궁극적으로는 자본 재생산의 악순환을 정지시키는 혁명적 지점으로 도시를 재설정하는 것이다.
“도시권은 배타적인 개인적 권리가 아니라, 집단에 초점이 맞춰진 권리이다. 도시권은 건설노동자는 물론 일상생활의 재생산에 기여하는 모든 사람의 권리를 포함한다. 돌봄 전문가와 교사, 하수도 및 지하철 수리공, 배관기술자와 전기기술자, 비계공과 목수, 크레인 기사, 병원노동자, 오락산업 종사자, 트럭 기사와 버스 기사, 택시 기사, 식당종업원, 은행원, 시청 공무원 등의 권리는 도시권에 속한다. (...) 이런 이유에서 도시권은 이미 존재하는 권리가 아니라, 도시를 사회주의적 정치체로 재건설하고 재창조하는 권리로 해석해야 한다. 한마디로 빈곤과 사회적 불평등을 근절하고 파멸적 환경악화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는 도시를 건설할 권리인 것이다. 이런 도시가 현실화된다면 영속적 자본축적을 추진하는 파괴적 도시 공간 형성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을 것이다.” (p234~235)
<반란의 도시>는 역사의 주체를 계급에서 도시로 전환하여 작성한 선언문 같은 느낌을 준다. 특히 월가 시위를 맞아 쓰여진 것으로 보이는 7장은 실제로 선언문에 해당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대중을 독자로 삼은 책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계급만을 주체로 삼는 이론 좌파들을 겨냥한 책이기도 하다. 언급하지는 못했으나, 이 책에는 공간을 재사유할 것을 권유하는 장치와 개념들이 산포되어 있다.
하비는 다양한 역사적 사례와 수치를 참고하고 있지만, <반란의 도시>의 이론적 구성은 그리 치밀하지 않다. 그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책은 완성태라기 보다 가능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비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한마디로 압축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헤테로토피아 공간을 구축하기 위해 대혁명이 오기를 기다릴 필요는 없다. 르페브르의 혁명운동 이론은 정반대이다. ‘돌입’하는 순간 여러 실천이 자연스럽게 결합한다. 이질적이고 헤테로토피아적인 집단은 갑자기 근본적으로 다른 무언가를 창출해내기 위해 집단적 행동을 벌인 수 있다는 것을 짧은 순간이나마 이해하게 된다.”(p21) <반란의 도시>는 르페브르의 전망을 계승, 혁명적 관점에서 재사유하면서 신자유주의와 자본의 재생산에 희생되고 있는 도시를 ‘희망의 공간’으로 보고자 한다.

고덕영

2006년에 결혼했다. 결혼 직후 용돈이 궁한 탓에 한 번 사면 오래 읽을 수 있는 난해하고 어려운 책을 뒤적거리기 시작한 게 화근이었다. 그런 책들을 오독하다 보니 '인문 딜레당트'로 '전락'하여 이런 저런 책을 뒤적뒤적하며 나락에 빠진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의구심이 없는 건 아니지만, 주로 인문 쪽 책들을 건너다닌다. 한 아이의 아빠이자 철딱서니 없는 남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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