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이병순이 누군지 전혀 몰랐다. 인터넷 용어를 빌면 명쾌해진다. ‘솔까말 듣보잡’이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듣도 보도 못한 잡놈이다.) 이 말은 이병순이란 개인이 KBS 사장을 할 수 있는 객관적인 능력과 충분함 경험을 갖췄는지 나는 도저히 검증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와 관련하여 내가 알고 있는 건 딱 한 가지뿐이다. 그는 낙하산이다.

낙하산 중에서도 3순위의 낙하산이었다. 정권이 그를 첫손에 꼽지 않았던 건 먼저 던지려고 했던 낙하산에 비해, ‘능력’과 ‘경험’의 질이 떨어졌기 때문이었을 게다. 그리고 세상지사 마찬가지인데 이왕에 떨어질 낙하산이라면 준비된 낙하산이 덜 패악스럽다. 받쳐야 할 충성의 양이 상대적으로 작고, 미워하는 눈이 많기 때문에 움직임이 제한된다.

정권이 애당초 던지려 했던 낙하산이었던 김인규는 학교, 감사원, 경찰, 검찰, 조중동까지 총동원하여 아예 나라 전체를 정연주를 위한 나라로 만들며 판을 너무 키워 버린 청와대의 그 미숙했던 일처리 때문에 제대로 꺼내보지도 못했다. 이런 걸 전문 용어로 ’나가리‘ 혹은 ’자동빵‘이라고 한다. 이 때까지 KBS 노조가 한 일이라곤 차려진 투쟁 판에 숟가락 얹어 놓은 것밖에 없다. 외려 밥상을 몇 번 엎으려 했다는 증언은 있다.

그 다음 카드로 준비했던 김은구 낙하산 역시 긴장을 상실하고 어이를 망각했던 대놓고 부조리한 식사 때문에 꺼내기 직전에 도로 집어넣은 것이지 KBS 노조가 투쟁으로 막아낸 것이 아니다. 그리고 역량을 총동원했지만, 정권 주변에는 정줄놓(정신줄 놓은)한 사람들만 있는 탓에 이도저도 무엇도 해볼 수 없게 된 상황에서 부랴부랴 아니면 말고 스타일로 이병순 낙하산을 후딱 던져버린 것이다.

동네 골목대장도 이리 뽑지는 않는다. 아무리 동네에 불량배 형들이 많아도 이런 식의 듣보잡을 낙점해서는 골목 아이들의 민심을 다스릴 수 없다. 최소한 동네 형들이 없어도 골목에서 체면치레 정도는 할 수 있는 아이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대장임에도 불구하고 골목 전체를 가시밭길처럼 여길 수밖에 없다.

▲ 박승규 KBS 노조위원장 ⓒ송선영
악에 바친 불량배 정권과 KBS가 일대일로 붙어서 이길 수 없음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촛불이 KBS로 몰려갔던 것이다. 그것은 여기가 힘이 약하다고 해서 부당한 삥을 뜯끼며 불량배와 골목에서 공존해야 하는 약육강식의 야만적 사회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래서 중요했던 것이 바로 ‘절차’였고, 또 ‘쪽수’였다. 불량배의 절차가 그야말로 불량스럽다는 것을 최대한 폭로하고, 끝까지 거부했어야 했다. 단단한 거부를 이어가기 위해서 골목의 아이들과 스크럼을 짜고 시민사회와 연대하여 불량배와의 치명적인 한 판을 준비했어야 했다. 그런데 박승규는 슬슬 꽁무니만 살랑거리더니 도저히 피해갈 수 없는 기회가 찾아오니, 그냥 곧바로 관두잖다. 그 기만함이 지긋지긋하고 너무 어이가 없어 가당찮다.

박승규 왈, 낙하산 개념이 비과학적이란다. 옳거니! 터진 입이라고 말은 잘한다. 그럼, 왜 정연주는 그렇게 도저히 같은 하늘을 두고 살 수 없는 철천지 원수처럼 미워했는가? 낙하산이어서 그랬던 거 아니었나? 비과학이라 함은 결국, 주관이란 뜻이요, 직감이란 뜻이요, 상황논리란 뜻일 텐데 까놓고 말해서 ‘나는 정연주가 싫어요’였다는 뒤늦은 고백쯤 되는 셈인가? 당신의 그 비과학이 바로 조중동의 비과학이고 방통위의 비과학이고 정권의 비과학이다.

“이상적으로는 현 제도 하에서 임명되는 사장은 모두 낙하산이고, 현실적으로는 모두 낙하산으로 규정하고 막기엔 한계가 있다”는 당신의 설명에 정말 국어를 배운 나 자신에게 화가 난다. 뻔뻔함도 이 정도면 형법상의 문제이고 기만함도 이만하면 민법의 문제가 분명 될 것이다. 그럼 여태 뭐하느라 그렇게 있는 똥폼 없는 개폼을 다 잡았던 것인가? 어차피 현 제도에서 임명될 수밖에 없는 것인데. 현실적으로 모두 낙하산이라면 특정 누군가는 안 된다는 그 알량한 기준은 이번에도 여지없이 이승복 어린이 수준의 자기 고백이었나? 통탄할 일이다. 더운 여름날에 묶었던 이마의 머리띠가 아깝고, 모두가 한 번쯤은 들어가 보고 싶어 하는 건물에 걸렸던 칙칙한 걸개가 오늘따라 더욱 을씨년스럽게 보일 뿐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분열에 이를 수 있다는 현실의 비극을 바로 이 시점에서 입증해낸 당신을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시대가 낳은 히드라(Hydra). 사람이 못 되고 괴물이 되어버린 노조위원장. 도저히 생각이 나질 않는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치욕적인 분열, 돌이킬 수 없는 배반의 책임은 분열과 배반의 삶을 살았고 또 살아 갈 수밖에 없는 바로 당신이 져야 하리라는 것이다. 뚫린 입을 놀려 함부로 뱉었던 ‘공영방송’, ‘방송 독립성’ ‘낙하산 사장 반대’와 같은 언어도단에 대한 책임을 당신은 당신의 비과학적인 머리와 가슴으로 평생 져야 할 것이다.

박승규, 당신이 하는 건 투쟁이 아니라 투정이다. 당신은 너무 쉽게, 빨리 그리고 너무 길게 또 완전히 나쁜 넘사벽(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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