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5일 우여곡절 끝에 대통합민주신당 대선후보로 뽑혔건만 당선 소식을 접한 정동영 후보의 얼굴이 마냥 행복해 보이지만은 않았다. 경선 과정에서 숱하게 불거진 불법 동원선거 논란에 대한 부담감 탓도 있겠고, 대회 하루 전에 결과를 미리 알려준 통합신당의 과잉친절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정 후보의 어깨를 짓누르는 부담감의 본질은 단연 ‘후보 단일화’ 압박인 것처럼 보였다.

대선후보 수락연설이 끝난 뒤 열린 기자회견에서도 누군가 정 후보에게 범여권 후보 단일화의 시기와 방법에 대한 구상을 물었다. 어린이집에서 김경준씨의 국내송환에 대한 질문을 받자 기자에게 “예의없다”며 준엄하게 꾸짖고는, “배고파서 안 되겠다”며 자리를 떠버린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후보의 어법대로라면, 이는 ‘예의없는’ 수준을 넘어 모욕에 해당할만한 질문이었다.

정동영 후보보다 더 큰 관심으로 떠오른 후보단일화

▲ 한국일보 10월16일자 5면.
하지만 이는 정동영 후보가 처한 엄연한 현실이기도 했다. 이날 행사장 안팎에서 화제의 중심으로 떠오른 것은 정동영 후보가 아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 후보의 대선후보 선출 소식보다는 후보 단일화 여부에 대해 관심이 있는 듯했다.

대회가 치러진 장충체육관으로 향할 때도 그랬다. 전남 여천이 고향이라는 택시 기사 모씨는 “정동영이가 되든 손학규가 되든, 유한킴벌리 문 머시기하고 이인제씨하고 다 합치면 해볼만하다”며 후보 단일화의 당위성을 강조했다. 기자가 내릴 때까지 택시 기사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행사장 밖에 모인 각 후보 캠프 관계자들과 기자들의 대화 내용 가운데서도 단일화 이야기는 빠지지 않았다. 행사가 끝난 뒤 다시 여의도로 돌아왔을 때 만난 각 당의 정치권 인사들도 대뜸 단일화 이야기부터 꺼냈다. ‘문국현이 10%가 되고 동시에 정동영이 20%가 안될 경우’ ‘문국현의 지지도와 이인제의 지지도가 합쳐서 10%가 될 경우’ 등 앞으로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경우의 수를 놓고 절묘한 분석과 기발한 셈법이 난무했다. 결과적으로 하루종일 후보 단일화 이야기를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은 셈이다.

이 정도면 거의 ‘묻지마 단일화’ 수준이다. 정동영과 문국현, 그리고 이인제 후보 등 세 사람의 정치적 노선과 정책에 대한 접근 방식에 대한 논의는 거의 없다. 세 사람이 각개약진 해서는 승산이 없으므로 무조건 뭉치고 보라는 식이다.

한나라당 이기려면 이유 묻지 말고 일단 뭉치고 보자?

▲ 경향신문 10월16일자 1면.
물론 후보단일화에 대한 정치권 안팎의 주문, 혹은 전망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멀게는 지난 1987년 이후 대선의 역사는 선거연합의 역사였다. 1987년 대선에서는 DJ와 YS 양김이 독자 출마를 고집하는 바람에 노태우 후보에게 승리를 헌납했다. 1992년에는 YS가 3당합당이란 방식으로 정권을 창출했고, 1997년 대선에서는 DJP연합, 2002년 대선에서는 노-몽 단일화가 승리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사정이 이러했으니 대선 전략 차원에서 제 정파가 선거연합을 꾀하는 것 자체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막 당선자 수락연설을 마치고 나온 후보를 붙잡고 후보단일화 전망부터 물어야 하는 현실은 아무래도 어색하다. 터를 닦고 기둥을 세우기 전부터 지붕을 얹는 격이고, 본말이 전도된 요청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후보 단일화를 해야 한다면 그 단일화를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부터 시작하는 것이 순리일 것 같다. 무조건 대통합 해야 한다고 해서 만들어놓은 ‘묻지마 신당’이 어떤 시행착오를 겪어왔는지 지켜본 사람이라면, 원칙도 논리도 없는 ‘묻지마 단일화’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리라는 예측도 크게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최성진은 현재 한겨레21 정치팀 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한때 MBC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서 방송작가 생활을 경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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