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버전트>는 세계가 거의 멸망에 처한 상태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시카고를 배경으로 합니다. 구사일생으로 생존한 시카고 시민들은 과거의 답습을 피하려는 대책으로 인간을 모두 다섯 개의 분파로 나누고 사회를 유지합니다. 자유와 용기로 군인이나 경찰의 역할을 하는 돈트리스, 거짓말은 절대 하지 않는 정직한 캔더, 평화주의자로 농업을 담당하는 애머티, 지성을 바탕으로 과학을 탐구하는 에러다이티, 그리고 주인공인 트리스의 부모님이 속한 애브니게이션은 이타심을 가지고 정치를 행합니다.

트리스를 비롯한 <다이버전트> 속 아이들은 자라서 적성검사를 받고 자신의 분파를 부여받습니다. 개중에는 본인의 의사를 따라서 꼭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거나 적성에 따르지 않고 스스로 선택하기도 합니다. 트리스는 적성검사 중에 난데없이 자신이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다이버전트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정확히 말하면 다이버전트는 다섯 분파의 장점을 모두 가지고 있으나, 지도자들은 이것이 현재의 사회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여겨 처단했습니다. 트리스는 용케 정체를 숨기고 돈트리스로 분파를 정합니다.

<다이버전트>의 세계관이 현실의 은유이자 풍자라는 건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훤히 보이고 있습니다. 그 대상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제일 눈에 띄는 건 기성세대의 통제에 저항하는 신세대의 심리가 반영됐다는 것입니다. 혈액형으로 사람을 분류하는 것처럼 <다이버전트>에서 다섯 개의 분파로 인간을 나누는 건, 관리하기도 쉽거니와 청소년의 잠재적이며 무한한 가능성을 싸그리 무시하고 몰개성으로 통일하겠다는 어리석은 욕심이 이식된 것입니다. 당장 우리나라의 교육환경을 보세요. 정부고 부모고 할 것 없이 공부 못하면 세상이 종말이라도 맞는 것처럼 청소년을 몰아붙이고 세뇌하기 바쁘지 않습니까?

한 가지 재미있는 건 일본과 우리나라는 청소년을 못마땅하게 바라보거나 염려하는 시각이 우선하는데, 할리우드는 <헝거 게임>에 이어 <다이버전트>까지 기성세대를 향한 청소년의 반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습니다. 물론 돈이 되니까 이런 구도를 도입하겠지만 전통적인 문화의 차이도 큰 요인일 것입니다. 혹자는 이번 여객선 침몰과 관련하여 그런 얘길 했더군요. "어른들이 하라는 대로만 해야 했던 아이들이 그것 때문에 사지로 내몰렸다"라고. 꼭 청소년만 해당하는 건 아니지만 은근 설득력이 있습니다.

아무튼 <다이버전트>는 다섯 개의 분파로 나뉜 사회를 창조한 건 좋았으나 그게 거의 전부였습니다. 세계관을 바탕으로 엮어야 할 이야기는 어설프고 안이하기 짝이 없습니다. 일례로 트리스와 오빠는 모두 부모님이 속한 애브니에기션을 떠나서 각기 다른 분파를 택하는데, 이 과정에서 아무런 갈등을 묘사하지 않습니다. 이건 비단 부모님의 바람을 거슬렀다는 것으로 인해서 오는 그것만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부모와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누구 하나 슬퍼하기커녕 신경도 쓰지 않습니다. 설마 이런 태도조차도 기성세대를 부정하는 청소년의 조롱이나 비아냥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요?

뿐만 아닙니다. 자, <다이버전트>의 세계에서는 적성검사를 하고 그 결과에 따라 분파를 정하는 게 보통입니다. 그런데 독재는 아니라는 걸 어필하고 싶은지 본인이 원하는 분파에 들어갈 수 있도록 선택권도 줬습니다. ​기본적으로 이게 말이 됩니까? 그럴 거면 애초에 적성검사는 왜 하나요? 적성과 무관하게 원하는 대로 어느 분파든 들어갈 수 있다고 칩시다. 지원하는 사람을 그 분파에서는 곧이곧대로 다 받아들일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트리스가 지원한 돈트리스에서는 일종의 서바이벌 게임처럼 성적을 매겨서 하위권을 탈락시킨다고 선언합니다. 심지어 이게 새로 생긴 규칙이라고 합니다. 이걸 듣고 질색하는 신입들을 전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다이버전트> 속 아이들이 다 멍청해 보였습니다.

만약 지원자를 그대로 다 받아들인다면 이 역시도 "그럴 거면 애초에 적성검사는 왜 하나요?"라는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이건 제 상식으로 하는 지적이 아니라 <다이버전트>의 세계관에 근거하여 투덜대는 것입니다. 분명 다섯 개의 분파는 정확하고 엄격한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에 따라서 나눈 것인데, 모조리 무시하고 마구잡이로 지원자를 받는다는 건 세계관 자체가 이미 뒤집히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이걸 피하려면 적어도 <다이버전트>의 세계에 속한 사람들은 이 사실을 인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모른다는 게 황당한 거죠. 영화에서는 돈트리스가 군대와 같아서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을 쫓아내는 것처럼 비추지만, 다른 분파도 동일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어야 세계관이 유지됩니다. 즉 <다이버전트>는 있으나마나 한 설정을 가지고 이야기를 엮으려고 하며, 내내 이런 식으로 얼버무리는 행태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두 시간이 넘는​ 상영시간의 절반을 돈트리스의 훈련을 지리하게 묘사하는 데 투자한 것도 허비였습니다. 아무리 봐도 이 과정에 <다이버전트>의 내러티브와 딱히 밀접한 연관이 있는 건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냥 보여주기였던 것입니다. 설상가상 훈련과정에 재미마저 없고, 숫제 교관과의 로맨스를 풀어가려고 무리하게 집어넣은 것 같았습니다. 그나마 트리스가 시카고의 마천루 사이를 활공하는 장면을 빼면 도대체 이 훈련을 왜 이리 길게 보여주고 있는 건지 납득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영화 속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논리를 보여주는 데는 좀 더 성의를 들였어야 합니다. 특히 말미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사건에 대해서는 충분한 설명이 없습니다. 도입부에서 "그냥 이 세계는 멸망 직전이었고 왜 전쟁이 난 건진 몰라도 돼"라고 했듯이 여기서도 "미안, 그냥 우리가 좀 배알이 꼴려서 그런 거고 넌 알 거 없어"라는 식입니다. 이처럼 <다이버전트>는 정작 작품의 핵심을 지지하는 대목은 얼렁뚱땅 넘어가면서 후반부에 오면 다시 액션에 치중하고 있습니다. 온전한 완성도를 가진다는 건 역부족일 수밖에요. 한 가지 위안을 찾으라면, 독립된 작품으로는 미달이지만 삼부작의 출발로는 형편없는 수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안 그렇겠습니까. 두 시간을 넘게 투자하면서 인내의 한계를 시험했는데!

★★★

덧) ​쉐일린 우들리의 연기는 예상보다 좋았습니다. 다만 외모에서 풍기는 분위기는 캐릭터와 어울리지 않아서 계속 신경이 쓰이더군요. 일단 동안은 아니라서 나이만 놓고 봐도 그랬습니다. <디센던트>에 출연했을 때 <다이버전트>를 맡았으면 좋았겠네요. 그것도 그렇지만 <헝거 게임>의 제니퍼 로렌스가 떠올라서 쉐일린 우들리의 트리스는 큰 인상을 주지 못했습니다. 원작의 팬들은 캐스팅에 어떤 반응이었나요?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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