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공주>는 도저히 리뷰를 쓰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영화가 시작하고 약 5분이 흘러 대략적으로 어떤 상황인지 파악이 됐을 때, 극장이라는 걸 망각하고 땅이 꺼질 듯이 한숨을 크게 내쉬고 말았습니다. 머릿속으로는 "어... 이게 아닌데... 이런 영화일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차라리 안 봤으면..."하는 생각만으로 가득했습니다. 줄거리라도 한 줄 읽어보고 관람여부를 택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겠네요.

각종 해외 영화제에서 수상한 <한공주>는 우리에게 익숙한, 그러나 어느새 잊고 말았던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입니다. 동일한 사건을 다뤘던 영화가 이미 몇 차례 나온 바 있습니다. 실은 "전 잘못한 게 없는데요"라는 포스터의 문구를 보면서 그게 무슨 뜻일지 궁금했습니다. 영화를 보니 그 짧은 5분 안에 의미를 알고도 남겠더군요. 그만큼 소재가 남겼던 충격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이 <한공주>를 꼭 보길 바라면서 충격을 완화하고자 말씀드리면, 주된 이야기는 밀양 집단 성폭행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었습니다. 기존에 나왔던 영화들과 다른 게 있다면 <한공주>는 피해자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처참한 광경을 나열하는 건 아닙니다. 도리어 <한공주>는 불편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하면서 관객을 배려합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수진 감독의 연출은 매우 영악합니다. 주인공 한공주는 끔찍한 사건을 당한 애라고 보기에는 쉬이 믿기 힘들 정도로 평범합니다. 이건 제게 두 가지의 의미를 전달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전혀 고려하지 못했던 것, 저 천인공노할 사건의 가해자는 짐승일 수 있을지언정 피해자는 어디까지나 평범한 여고생이라는 것입니다. 즉 한공주는 고통에서 회복하고 평범한 다른 여고생처럼 세상을 살아나갈 수 있는, 아니 살아나가야 하는 인물이며 그럴 수 있게끔 우리가 보듬어야 하는 인물이란 것을 부지불식간에 간과했다는 걸 <한공주>가 깨우치게끔 하고 있었습니다. 이수진 감독의 놀랍도록 섬세하고 사려 깊은 연출의 공이 컸지만, 그 못지않게 한공주를 연기한 천우희의 연기도 탁월했습니다.

으레 피해자라고 하면 측은하거나 불쌍하거나 고통만으로 가득한 존재라고 받아들이기 쉬운 게 보통입니다. 반면 <한공주>는 적어도 일상에서만큼은 특별히 다를 게 없는 한 명의 인간으로 조명하고 있습니다. 엄마에게 찾아가서 하는 행동을 비롯해서 장면마다 여고생다운 말을 하는 걸 보면 우리가 저 아이를 본의 아니게 차별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어떻게 보면 현실감이 없는 걸로 보일 수도 있으나 한공주라는 캐릭터를 천우희는 감독과 더불어 꽤 신선하게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녕 한공주와 같은 인물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헤아리면 이 해석을 통해 배울 게 많습니다.

또 한 가지는 영화에서 한공주가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고자 노력하는 걸 보면서 도리어 가슴이 더 아팠다는 것입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하는 것처럼 보여서 그렇기도 하고, 저런 아이에게 일어난 끔찍한 사건이 떠올라서 태연하게 보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과거의 사건과 직접적으로 맞닥뜨리게 하는 일만 아니라면 매번 무덤덤하게 말하는 것도 큰 충격에서 오는 증세인 것만 같았습니다. 더욱이 그 사건을 중간중간 플래시백으로 삽입한 건, 설사 일상으로 돌아오더라도 한공주의 기억에서 금세 지워지진 않을 것이라는 걸 보여주고 있음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한공주>에 대한 호평의 근원은 아닙니다.

말했다시피 이수진 감독은 <한공주>의 방점을 분노와 고통이 아닌 희망과 응원에 찍고 있습니다. ​우린 영화를 보면서 한공주의 끔찍한 기억도 공유하지만 그 이상으로 현실에 남은 어떤 가능성과 기대를 확인하고 간직한 현실과도 마주합니다. 특히 마냥 판타지로 다루지 않고 현실적인 이야기와 주변 인물을 통하고 있어서 더 공감대를 얻고 몰입과 감정이입을 극대화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한공주>는 캐릭터의 이름을 제목으로 삼은 영화답게 한공주의 심리를 관객에게 절절하게 전달합니다. 이수진 감독의 각본과 연출은 수준급이며, 천우희의 연기는 <우아한 거짓말>에서 봤던 자질을 맘껏 발산했습니다. <써니>에서의 강한 캐릭터만이 아니라 한공주처럼 예민하고 복잡한 내면을 가진 캐릭터에도 능하다는 걸 증명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에 저는 살인사건 현장을 목격한 적이 있습니다. 한동안 자의와 무관하게 그 장면이 자꾸 떠올라서 굉장히 괴로웠습니다. 아마 <한공주>가 제게는 그런 영화로 남을 것 같습니다. 지금껏 극장에서 영화를 보다가 중간에 나오고 싶었던 경우는 더러 있었습니다. 다른 게 있다면 <한공주>는 재미가 없거나 지루해서가 아니라 심적인 고통을 도무지 감내하는 게 ​힘들었습니다. 여자분들이라면 저보다 몇 배 이상으로 고통스러워 몸서리를 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보시지 말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여러분이 꼭 <한공주>를 보셨으면 합니다. 영화의 말미에 가면 사건 현장에서 자신의 아들만 조용히 데리고 나오는 아버지가 나오는데, 그는 한 새끼가 성폭행을 하고 있는 걸 보면서도 외면하고 빠져나갑니다. 저는 이 장면이 극도로 혐오스럽고 끔찍하면서도 시사하는 바가 엄청나다고 생각합니다.

★★★★☆​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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