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연극 <메피스토> 가운데서 그레첸을 임신시키고 나락으로 떨어뜨린 죄 많은 파우스트라 하더라도 결국에는 신이 파우스트를 구한다는 깔뱅의 예정론적 개념, 결정론이 파우스트의 영혼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메피스토의 자유 의지보다 우선시된다는 점을 기술한 바 있다. 결국 <메피스토>의 세계관은 자유 의지와 결정론의 대립에서 결정론이 우선하는 세계관이다.

영화 <다이버전트>의 세계관 역시 결정론이 지배한다. 개인이 하나의 직업으로 평생을 살아가기 어려운 시대가 도래했음에도 <다이버전트>의 세계는 16살에 받는 적성검사 결과 하나만으로 평생을 하나의 직업에 몸 바쳐야 하는 세계다. 가령 아는 게 많고 지적이다 싶으면 과학자 그룹인 에러다이트에 포함해야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는 현대 사회의 개인이 평생 다양한 직업군을 거쳐야 하는 것과는 상반되게 농경 사회, 혹은 산업 혁명 당시 개인이 하나의 직업으로 평생을 보낸 것과 일맥상통한다.

적성에 맞는 직업에 속하는 분파를 택해야 하지만 만일 분파를 벗어나면 다른 분파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무분파로 살아가야 하는 <다이버전트>의 세계관은 개인이 한 분파에 평생 속해야 하는 결정론적 세계관의 본보기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다이버전트>의 다섯 그룹 중 그 어느 그룹에도 포함하지 않는 이들이 드물게 있다. 이들은 영화 제목대로 ‘다이버전트’로 불리는 이들로, 사회 체계의 안정에 위협적인 인물로 간주되어 1순위 제거 대상에 해당된다. 다섯 개의 분파에 속해 평생을 살아야 하는 결정론적 세계관과는 상반된, 개인의 자유 의지를 보여주는 이들이 다이버전트에 속한 사람들이다.

<메피스토>가 신의 결정론이 자유 의지보다 중요시되는 세계관이라면 <다이버전트>는 반대의 경우에 해당한다. 인간의 자유 의지가 다섯 분파에 평생을 종사해야 하는 시스템의 결정론보다 우위에 있음을 방증하기에 그렇다. 영화에서 자유 의지는 결정론적 세계관보다 중요하게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설계된 미래라는 결정론을 받아들이기 거부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다룬 맷 데이먼의 <컨트롤러>나 우생학적 결정론을 다루는 에단 호크의 <가타카> 같은 영화들은 사회 체계가 규정한 결정론적 세계관에 순응하기보다는 자유 의지로 생을 자유롭게 개척하기 바라는 개인이 결정론적 사회에 맞서는 투쟁기 아니던가.

심지어는 <쥬라기 공원>의 공룡들 역시 하나의 성(젠더)로만 태어나야 하는 쥬라기 공원의 결정론적 세계관을 거부하고 양성으로 태어날 정도니, 이 정도면 결정론적 세계관에 대한 반감이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자유 의지로 표방된다고 묘사하는 것이 맞을 정도다. <다이버전트>는 결정론적 세계관에 반기를 드는 것은 물론이요, 인간의 자유 의지가 결정론적 세계관보다 얼마나 소중한가를 틴에이지 미래 디스토피아 영화를 통해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다이버전트>에서 결정론보다 중요한 건 인간의 자유 의지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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