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주: 이 책을 소개하면서 나는 부끄러움에 몸을 배배 꼬게 될 것 같다. 내 소개로 이 책을 읽은 이들이 혹시라도 있다면, 내가 쓴 보고서를 읽고 얼마나 비웃을 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남에게 소개하기 전에 너부터 읽지 그러냐는 비아냥거림이 벌써부터 귓가에 울리는 것 같다. 그러나 이전 보고서에서 붓다의 가르침을 전한 사람으로서, 나 자신과 타인을 이롭게 할 만한 좋은 정보가 있는데 어찌 나누지 않겠는가? 이전 보고서를 통해 번뇌의 봉인에서 해방되길 기원했던 나는 이번에는 당신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봉인에서 해방되기를 기원하며 이 보고서를 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봉인’이라는 말은 일본의 유명한 인지과학자이자 경기 디베이터(Debater)로도 활동한 토마베치 히데토(苫米地英人)가 쓴 <ディベートで超論理思考を手にいれる>에서 등장한다. 이 책은 <논증의 탄생>과 같은 논증 모델인 ‘툴민 모델(Tulmin Model)’을 이용한 디베이트를 해설한 책으로, 이 책에서 그는 툴민 모델이 사고를 병렬적으로 처리하는 반면, 기존의 삼단논법은 직렬로 처리하기 때문에 압도적인 속도 차가 나타난다고 지적한다. 삼단논법은 유용하나, 뇌의 능력을 제한해 사고속도에 병목현상을 일으키기 때문에 이를 ‘발명’한 아리스토텔레스가 뇌를 봉인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논지였다. 그는 툴민 모델을 이용한 경기 디베이트를 익히면 당신의 뇌는 비약적으로 사고속도가 빨라지는 초논리사고를 손에 넣을 수 있다고 권유한다. 안타깝게도 그의 책은 번역이 되지 않았으며, 글쓰기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나는 더 권위 있고 기초적인 <논증의 탄생>을 소개한다. 이 책은 한번 읽고 마는 단순한 책이 아니다. 교과서이자 참고서로써, 논리적인 문장을 쓰고자 하는 이, 논리적으로 상대를 설득하려는 이, 스스로의 생각을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싶은 이라면 항상 옆에 두고 읽어야 한다. 만일 이전 보고서를 읽은 사람이라면 기억할 것이다. 2600년 전, 붓다는 일과 사고를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처리하는 합리적인 판단을 하는 사람이 부를 얻을 것이라고 가르쳤다.

마지막으로, 보고서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크래프트(Craft)와 아트(Art)의 논의를 더 깊게 이해하고자 하는 분들에게 김용옥의 <태권도 철학의 구성원리>(통나무)에서 쿵푸(工夫)의 개념에 대해 언급한 부분을 참조하길 권한다. 그 외에도 격의(隔意)의 개념틀 등도 김용옥의 저서에서 빌려왔음을 밝힌다.

(에이전트 S009)
---(이하 보고서)---
범은하활자박멸운동위원회 정기 보고서
작 성 자: 9급 에이전트 S009
문서번호: 20140216SMCHS402-17GNM00006
시행일자: 2014/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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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논증의 탄생
저 자: 조셉 윌리엄스, 그레고리 콜럼
출 판 사: 북바이북
보고내용:
1. 당신들 행성 파흐헤르네이트451의 지성체는 설득이나 논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다. 하나에서 전체, 전체에서 하나인 당신들의 존재에는 모든 것이 너무도 명확하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우리 지구인은 자아를 가지고 있는 독립된 개성체다. 따라서 우리 지구인은 모이면 모일수록 서로의 생각과 발언은 부딪히고 파편화된다. 이러한 부딪힘을 아규먼트(Argument)라고 부른다.
보고자가 위치한 지역(작가 주——대한민국)에서 이 아규먼트는 논증(論證)이라고 번역된다. 내가 당신들에게 보고서를 보낼 때 당신들과 지구인인 나 사이의 오해가 발생하듯 한 언어의 특정한 개념을 다른 언어로 옮길 때에는 언어가 가진 문화적, 역사적 차이로 인해 의미의 변화가 발생한다. 이를 격의(隔意)라고 하는 데, 아규먼트가 논증이 되는 과정 중에서도 발생한다.
논(論)에는 말하다, 사리를 밝히다, 이야기하다 등의 의미가 있고 증(證)에는 알리다, 사실을 밝히다 등의 의미가 있어 종합하면 각자 ‘발언한 말의 본래 의도와 의미를 밝히고, 상대에게 알리다’ 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 때문에 보고자가 위치한 지역에서 논증이란 자신의 의견을 체계적으로 알리는 데에만 한정되고, 본래 아규먼트라는 개념에서 나타나는 부딪힘의 이미지는 약해지고 만다.
2. 이 책의 내용에서도 엿볼 수 있듯, 아규먼트는 대립되는 의견을 전제로 하고 있다. 단순히 자신의 의견을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의 의견이 당면한 문제에 가장 잘 들어맞는 조각인지를 비교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본 책의 원저가 <The Craft of Argument>이지, <The Art of Argument>가 아닌 것이다.
아트(Art)는 흔히 예술로 번역되는데, 기술이라는 의미가 있기는 하나 말 그대로 예술의 경지에 오를 정도라는 말처럼 특수한 기술이자 고유의 기술이다. 기술을 익히는 데 있어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을 경쟁상대로 삼으며 각자의 존재만큼이나 고유하다. 따라서 무도(武道)를 마샬아트(Martial-Art)라고 번역한다. 아트는 도(道)이자 쿵푸(工夫, 공부)이며, 번역술어 논증은 이에 더 가깝다. 그러나 원 개념 아규먼트는 크래프트에 더 가깝다.
크래프트(Craft)는 보통 수공예, 특정 활동에 필요한 모든 기술이라는 의미로, 목공예나 금속공예 같은 활동에 주로 사용한다. 이는 누구나 배울 수 있는 기술체계로, 기술의 숙련도가 아니라 기술로 인해 만들어 낸 결과물로 평가받는 객관적인 것이다. 따라서 문제라는 빈 공간에 1) 누가 더 잘 맞는 조각을 2) 얼마나 튼튼하게 만들었는지를 서로 겨루는 과정인 아규먼트에는 아트가 아닌 크래프트가 필요하다. 상대의 반론을 상정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3. 이 책에서는 아규먼트를 위해 자신의 논리를 구축하고, 반론에 대한 재반론을 구축하는 크래프트를 소개하고 있다. 이는 아트가 아닌 크래프트기 때문에 누구라도 노력만 하면 익힐 수 있다. 이 크래프트에서 사용하는 가장 중요한 도구가 바로 툴민 모델이다.
툴민 모델은 스티븐 E. 툴민에 의해 비로소 학문으로 정립된 변증학의 기초로, 현실세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통계적이고 실용적인 논리 모델이다. 기본적으로 ‘특정 문제’에 대한(이게 가장 중요하다!) 논리는 기본적으로 3가지로 구성되는 데 ①주장, ②이유, ③근거로 나뉜다. 주장은 특정 문제에 대해 취해야 할 행동이나 입장이고, 근거는 객관적인 정보로 통계 등이며, 이유는 주장과 자료를 엮으며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다. 여기에 주장과 이유를 이어주는 ④전제, 이유와 자료에 가해질 예상 반박을 재반박하는 ⑤반론수용과 반박이 추가되어 완전한 논리가 구축된다. 이 3개에서 5개의 요소는 순차적으로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병렬적으로, 말 그대로 나무를 깎아 만든 부품처럼, 동시에 ‘공간적으로’ 구축된다. 이 점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과의 차이다.
많은 이 지역 지구인들은 논리적인 글을 써야 할 때, 가장 먼저 문제를 명확히 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그 이유는 논리와 논증이 대립되는 부딪힘이 아니라 자신을 완벽히 다듬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저 자신의 입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만 모아둘 뿐 이유를 밝히지 않거나, 아예 주장만 하고 마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논리적인 사람이란 자신의 주장과 근거만 밝힐 뿐 상대의 주장을 들으려 하지 않는 고압적인 사람이라는 인식이 이 지역 지구인들에게 존재한다. 이는 잘못된 것이다.
4. 보고자는 당신들이 이 책을 ‘소멸’시킨다면 어떻게 개체인 지구인이 서로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의사소통하는 지에 대한 크래프트를 잃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따라서 당신들은 이 책을 ‘소멸’시킬 것이 아니라,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들은 지구인이 이룩한 과학이라는 체계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당신들은 서로를 너무 100% 이해하고 만다. 서로가 완벽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탄생하는 진화와 발전을 이 책을 통해 이해하기를 바란다.
끝.
범은하활자박멸운동위원회 지구지부 서울파출소

손지상

소설가이자 번역가이다. 미디어스에서는 범은하활자박멸운동위원회에 정기 보고서를 제출하는 '9급 에이전트 S009'를 자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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