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에게 있어 일본은 늘 뜨거운 화두였다. 한일관계는 정치적, 경제적으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식민지배와 과거사 문제사 문제를 배경으로 하는 양국간의 감정은 늘 갈등의 불씨가 되어왔다. 그러한 점에서 일본은 분노와 경계 그리고 우려의 대상이었고 일본의 우경화나 군국주의 부활에 대한 주제는 한국 언론의 단골 주제였다. 특히 아베 정권 출범과 더불어 이러한 성향이 보다 본격화됨에 따라 일본의 급격한 우경화와 그 바탕이 되고 있는 일본 내부의 내셔널리즘의 활성화는 더 많은 우려를 낳고 있다.

이 책은 그러한 현상을 일본 사회 내부의 동학이라는 측면에서 고찰하고 있다는 점에서 두드러진다. 현재의 우경화와 내셔널리즘의 흐름은 이미 오랜 세월에 걸쳐 누적된 원인이 표면화된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그 중심은 1990년대가 되고 있다. 저자는 1990년대를 축으로 하여 그 시점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일본의 전후를 조망하면서 동시에 그 흐름이 1990년대를 기점으로 어떻게 변하였고 현재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인가를 세밀하게 살피는 얼개를 취하고 있다.
일본에서 전후라는 단어는 전쟁이 끝난 이후라는 문자적 의미를 넘어서 사회 경제 정치 문화 등 전 분야에 걸쳐 일본을 지탱했던 패러다임을 의미한다. 이는 일본의 현재 모습이 탄생하고 지속될 수 있었던 발판이었다. 우선 전후는 안정과 번영의 시대로 묘사된다. 전쟁의 패배로 인한 참화를 딛고 일어서서 눈부신 경제 경장을 이룬 성공의 시대이다. 계속적인 성장에 의거하여 사회적으로는 미래에 대한 낙관과 희망을 투영할 수 있는 시대였다. 책에서 '위를 보고 걷자’나 ‘고교 3년생’같은 당시의 유행 가요를 인용하면서 이런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반면 또 한 측면에서는 전후는 고도성장으로 인한 자본주의화에 대한 반발, 미일 동맹에 대한 반대로 대변되는 혁명의 서사가 적용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60년대의 안보투쟁과 전공투로 대변되는 학생운동 역시 사회주의 혁명으로 대변되는 또 다른 장래의 상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전후에 대한 두 가지 상, 책의 표현을 빌리자면 두 가지의 ‘큰 이야기’는 서로 길항작용을 통하여 전후의 각기 다른 측면을 반영하면서 그 흐름을 이끌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이를 바탕으로 일본의 ‘전후’를 반추하면서 이를 지탱해온 배경을 지탱해온 "큰 이야기"와 그 속에 내재되어 있던 모순과 계기들이 어떻게 드러났는지를 말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전후에는 경제성장에 의한 번영과 발전’, ‘사회주의 혁명의 미래’라는 두 가지 서사가 있었다. 그러나 후자는 적군파의 아사마 산장 사건으로 급진적 투쟁이 종식을 맞음으로써 도태되었고 일본은 경제성장을 통한 고도의 발전과 번영을 이룩하였다. 번영과 안정을 구가하면서 고도 성장사회가 실현되면서 전자의 서사는 더 이상 지향점이 아닌 주어진 현실로 자리잡았고 이에 수반하여 고도의 소비사회를 낳았다. 그러나 더 이상 소비사회는 개인의 파편화와 고립, 자폐성과 정체성의 부유 같은 불안을 낳게 되고 이는 옴 진리교 사건의 한 배경이 되었다.
저자는 일본 내 여러 가지 현상과 이에 대한 일본 내의 진단을 제시하면서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전후의 체제가 흔들리게 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 시기는 일본에게는 여러 모로 격변의 시대였다. 국내적으로 호황을 구가했던 거품 경제의 붕괴와 55년 체제로 상징되던 자민당 장기 집권의 종식, 그리고 불황으로 인한 ‘종신고용’과 ‘1억 총 중류 신화”의 붕괴와 신 자유주의적 격차 사회의 등장, 또한 냉전 체제의 종식으로 인한 안보상 불안정, 이 모든 것들은 이전까지 당연하게 보였고 일본의 번영을 보장해주었던 조건을 일변시켰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경제호황을 배경으로 등장했던 포스트 모더니즘 담론을 중심으로 한 소비사회에 대한 예찬과 여러 전망들은 불황과 격차 사회의 도래로 그 설득력을 잃게 되었고 일본의 청년들은 생존의 불안과 희망이 부재한 삶 속에서 ‘잃어버린 세대’로 등장하였다.
책에서는 아마마야 가린과 아카키 도모히로 같은 젊은 세대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들 젊은이에게는 전후의 번영과 민주주의가 공허하게 비추어졌고 한층 더 나아가 자신들의 처지를 속박하는 함정으로 보여졌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전후 민주주의와 호헌 체제가 이들에게는 더 이상 설득력을 가질 수 없고 오히려 기득권의 온상으로 비추어졌다는 것은 최근 수 년간 대두된 청년층의 우경화 성향 그리고 이른바 넷 우익 세력의 대두에 대한 흥미로운 실마리를 제시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저자가 일본의 전후 체제를 무조건적으로 긍정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전후 체제의 번영과 발전에 가려서 보지 못했던 그 속에 있던 내재적 문제들이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분출되었고 그에 대한 분노와 대응이, 뒤틀리고 모순되었긴 하지만, 우경화와 내셔널리즘의 대두로 이어지게 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옴 진리교 사건을 전후 일본 사회의 불안과 모순 그리고 좌절이 분출된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은 특히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특히 여기서 주목하고 있는 것은 이 사건이 실패한 사회주의 혁명의 대체물이었다는 관점이다.
과거 사회주의 혁명의 서사가 소멸되고 고도 소비사회에서 파편화되고 부유하는 개인, 특히 청년층들이 공허함을 극복하기 위한 의미로써 잡은 것이 옴 진리교였다. 책 문두에서 인용한 아마마야 카린의 말에서처럼 옴 진리교는 허무와 좌절에 빠진 청년층에게 ‘사는 의미’를 제공하였고 이로 인하여 젊은이들에게 큰 호소력을 가질 수 있었다는 점이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이 옴 진리교의 세계관이 서브컬쳐에 기반한 종말론에 기반하고 있었으며 교리 선교나 내부 교육의 도구로 만화, 애니메이션 등의 서브 컬쳐물을 활용했다는 점이다. 옴 진리교가 제시했던 세계 종말이나 최종 전쟁의 이야기는 비록 기존의 종교에서도 비슷한 교의를 찾아볼 수 있지만 그 내용이나 방식은 기성 종교보다는 애니메이션, 만화, 게임 등에서 제시된 세계관에 더 가까웠다.
이런 점에서 옴 진리교는 자본주의적 번영의 끝에서 몰락한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서사를 대체하는 서브컬쳐에 바탕을 둔 위사(僞史)였다. 본문에서 아즈마 히로키를 인용하면서 말하듯이 그러한 위사(僞史)는 좌절된 큰 이야기의 부재를 메꾸기 위한 행동양식이며 기존의 가치규범이 부전한 것에 대한 소비사회적 대응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 한 옴 진리교의 교주 아사하라가 미나마타 병의 피해자였다는 것 역시 옴 진리교가 전후의 변영과 성장 속에서 은폐되었던 어두운 면의 표출이라는 것을 웅변하고 있다.
옴 진리교가 전후의 소비사회 속의 불안을 서브컬쳐적 종말론에 근거하여 반영하였다면, 미야다이 신지가 ‘끝없는 일상’ 이라고 칭한 대서사나 미래에 대한 희망이 부재한 체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상과 권태 그리고 허무로 반복되는 세계관이 서브컬쳐의 또 다른 측면에 있었다. 이는 옴 진리교가 전공투의 대체물로써 변혁의 서사를 대체하는 흐름이었다면 “끝없는 일상”은 고도 성장기의 발전이 현실화되면서 더 이상 상승지향의 동인이 되지 못한 상황에서 체제 순응으로-그러나 불안을 잠재한 체- 이어지는 흐름이었다. 후자는 발달되고 범람하는 소비문화와 부유하는 개인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양자는 상반된 면을 가졌지만 양 쪽 모두 발달한 소비사회와 그를 지탱하는 경제적 조건에 의거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마치 동전의 앞뒤와 같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전자가 그런 상황을 극복하고 일거에 바꿀 ‘커다란 한 방’을 여전히 기원했었다면 후자는 그런 현실에 대한 좌절과 체념 그리고 냉소와 부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90년대의 불황과 신자유주의 격차 사회의 도래는 그러한 ‘끝없는 일상’을 가능케 하는 경제적 기반을 무너뜨리게 되었고 그러는 가운데 전후의 명분은 더 이상 설득력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 생존의 위협에 시달리는 빈곤 속에서 부유화 되고 파편화된 개인의 문제는 계속되고 있고 이에 대한 대응이 결국 국가에의 투신으로 향했고 현재 일본이 겪고 있는 우경화와 새로운 내셔널리즘의 배경이 되었다는 것이 이 책의 진단이다.
이렇듯 이 책은 일본의 우경화와 내셔널리즘의 흐름과 그 배경을 일본 내부의 시각으로 1990년대의 일본 사회의 여러 현상과 사건을 특히 문화적 흐름과 맥락을 통하여 보여주고 있으며 그를 바탕으로 현재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무척 주목할 만하다.
다만 다루고 있는 주제가 방대하기 때문에 그러하기도 하지만 약간 부족한 것 같은 일부 대목이나 논지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몇 가지 의문을 제기하고 싶다.
첫째로 옴 진리교가 청년층을 흡입할 수 있는 배경으로 위사(僞史)를 들면서 이것이 좌절되자 국가에 대한 투신으로 이어졌다는 견해에 대한 좀 더 세밀한 분석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다. 이는 서브컬쳐와 위사(僞史)와의 관련에 대한 분석이 상당 부분 아즈마 히로키의 오타쿠 론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 이론이 전제하고 있는 세대 구분, 즉 큰 이야기의 좌절과 이를 대체할 거짓된 큰 이야기 위사(僞史) 추구에 이어 이야기가 아닌 캐릭터에 대한 소비 등으로 미분화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고 한다.
즉 옴 진리교 때까지만 해도 설득력을 지닐 수 있었던 큰 이야기의 위사(僞史)가 캐릭터 소비나 특성(흔히 ‘모에’라고 이야기되는) 소비가 주축을 이루고 있는 현 세대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 지에 대한 좀 더 세심한 고찰이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이런 점에서 1장에 제시된 가벼운 내셔널리즘, 귀여운 천황 등에 대한 언급은 이러한 측면에서의 고찰을 통하여 좀 더 명료하게 제시될 수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특히 80년대 및 90년대 소비사회론과 이를 바탕으로 한 서브컬쳐에 대한 치밀한 분석을 볼 때 90년대 이 후 성향을 파악하고 이를 적용하려는 시도가 다소 부족하지 않았나 하고 여겨진다.
두 번째는 현재 현실에 대한 좌절을 배경으로 터져 나온 우경화와 내셔널리즘의 대두가 어디로 향할 지에 대해서도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다. 현재의 내셔널리즘의 배경이 되고 있는 젊은 층들이 과연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그들이 지향하는 바가 또 다른 ‘커다란 한 방’을 꿈꾸고 있는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일종의 일탈, ‘니찬네르화’로 대변되는 냉소와 조소의 또 다른 변용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 그러한 성격에 대한 성찰이 좀 더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이를 통하여 현재 진행되고 있는 우경화의 성격을 더 명확하게 파악하고 나아가 이에 대한 전망을 제시할 수 있지 않나 여겨진다. 특히 후자의 문제는 현재 일베로 대변되는 한국의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은 바 이에 대한 좀 더 세밀하고 진지한 고찰이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느끼게 한다.
선량민
늘 오해받지만 평범한 일반인 맞습니다. 업계 진입 희망자지만 언제 실행될지 알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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