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가을 서울시장 보궐선거 국면 즈음부터 시작된 ‘안철수 현상’은 진보정당 운동을 꿈꾸던 이들에게도 심각한 사건이었다. ‘안철수 현상’은 국민들이 더 이상 거대양당을 신뢰하지 않으며, 무당파의 숫자가 새누리당과 민주당의 지지자의 숫자만큼이나 늘어났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또 한편으로 ‘안철수 현상’은 유권자들이 더 이상 진보정당을 양당제를 벗어나려는 제3정치세력의 대표로 보지 않으며, 정치권 바깥의 인물에게 그런 역할을 기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사건이기도 했다. 진보정당 운동에 종사했던 이들의 처지로서는, 2004년 총선 민주노동당의 의회 진출 및 10석 획득이라는 성과르 증명되었던 유권자들의 진보정당에 대한 호기심이 후속 성과를 내지 못하고 지나쳐갔단 사실을 가슴 아프게 받아들여야 했다.
그후 대선 과정과 대선 이후 전개된 ‘민주당 지지자’와 ‘안철수 지지자’의 논쟁은 진보정당 운동을 신뢰하던 이들을 더욱 소외시켰다. 이들의 극한 대립 속에서 진보정당 운동을 꿈꾸던 이들의 자리는 없었다. 심지어 ‘민주당 지지자’는 진보정당 지지자들이 ‘안철수’에 더 호의적이라 오해하기도 하였고, ‘안철수 지지자’는 그들이 ‘민주당’ 혹은 ‘친노’에 더 호의적이라 오해하기도 하였다.
▲ 김한길(오른쪽 부터), 안철수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 전병헌 원내대표, 노웅래 사무총장이 2일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사실을 말하자면 진보정당 운동의 지지자들의 시선에선, 민주당을 싫어 해야 할 이유도 많았고 안철수를 싫어 해야 할 이유도 많았다. 그리고 그 이유 중 어느 부분에 특히 집착하느냐에 따라 선호도가 갈렸다.
가령 진보정당의 당원이었다면 야권연대, 후보단일화, 비판적지지 등 무슨 이름으로라도 민주당이 새누리당과의 ‘일대일’ 선거구도를 만들기 위해 군소 후보의 사퇴를 종용한 사실에 대한 아픈 기억이 있을 것이다. 양당제에 적합한 선거제도 속에서 제1야당인 민주당이 기타 야권 세력에 대해 일종의 ‘지대’를 추구한다는 불만이 강했던 이들은, 2012년 당시 대선 당시 후보단일화 협상 과정이나 통합 전 민주당 측이 야권연대를 강요하는 부분 등에서 심정적으로 안철수 측에 동조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진보정당의 지지자들은 ‘반여의도 포퓰리즘’적 정치개혁에 매우 부정적인 이들이라는 측면이 있다. 그들은 2004년 3월 비민주적인 지구당 운영, 사당화된 지구당위원장제, 지구당 운영에 따른 막대한 정치자금 등의 폐해를 이유로 정당법 개정을 통해 지구당이 폐지된 것이 진보정당에게 얼마나 불리하게 작용했는지를 기억하고 있다. 그런 이들의 시선으로 지난 대선 안철수 의원이 내세운 ‘국회의원 정수 축소’나 이번 새정치민주연합 탄생의 근거가 된 ‘지방선거 기초선거 정당 무공천’과 같은 제안들을 정치개혁으로 받아들이고 동의할 수는 없다.
또한 2012년 대선 문재인 캠프의 선거공약이 안철수 캠프의 그것보다도 ‘진보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대선 이후 안철수 의원의 행보가 안철수 캠프의 선거공약보다도 보수적이었다는 점을 분명히 평가하고 있는 진보정당 지지자들도 흔치 않다.
결국 ‘진보정당 지지자=XXX편’이라는 ‘민주당 지지자’와 ‘안철수 지지자’의 논리는 자신들의 관점에 서서 그들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진보정당 지지자들을 상대편이라고 낙인찍는 것에 불과했던 셈이다. 설상가상으로 안철수 측이 민주당과 함께 하게 되자 진보정당들은 ‘관심도 사라지고 제도개선의 전망도 사라진’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정의당의 경우 내부에서 안철수 의원이 만들어낸 새정치연합 측이 ‘제3정당’의 길을 고수했을 경우 그 노선의 향방을 따져 합당하거나 연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흐름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의당 사정을 아는 한 관계자는 “안철수 의원이 신당을 만들어낸다 하더라도 민주당에서 의원들이 우르르 나가서 합류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그렇다면 의석이 몇 석(정의당의 현재 의석 수는 5석이다)이라도 되는 정의당과의 연대가 그쪽에 필요해질 수도 있겠다는 계산이 있었을 것”이라 설명한다.
정의당은 고려대 최장집 명예교수가 안철수 의원의 ‘정책네트워크 내일’의 이사장에 선임되었을 때 가장 큰 기대를 가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최장집 교수가 안철수 의원 측에 합류하고 ‘진보적 자유주의’를 말했을 때가 정의당 측이 안철수 의원 측과 가장 통합의 접점이 큰 시기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최장집 교수가 내세운 ‘진보적 자유주의’는 사회민주주의보다는 다소 오른쪽인 노선으로 여겨졌지만, 한국 정치의 기성 보수 정당의 노선들에 비한다면 정의당의 입장에서 전혀 수긍하지 못할 제안은 아니었다.
또한 한국 정치학계의 대표적인 정당정치론자인 최장집 교수가 안철수 측의 반정치·탈정치적 성향의 ‘반여의도 포퓰리즘’을 통제할 수 있었다면 정의당이 안철수 의원 측과 연대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들기가 훨씬 수월했을 것이다. 정의당 사정을 아는 다른 관계자는 “최장집 교수가 안철수 측에서 이탈했을 때 정의당의 몇몇 인사들은 실망하여 그 원인을 알아보기도 했다”라고 전한다.
물론 정의당 내부에는 안철수 측과의 합류에 우호적인 이들 뿐만 아니라 반대했던 이들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런 이들에게도 안철수와 민주당이 함께 새정치민주연합을 결성한 상황은 당혹스럽다. 안철수 측이 제3정치세력으로 존재했을 경우 민주당에 대해 총선 비례대표제 확대나 대선 결선투표제 등 다당제에 유리한 제도 개선을 요구했을 가능성이 높고, 안철수 측의 지지율을 고려해봤을 때 민주당이 이를 수용했을 가능성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 지난 3월 10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후쿠시마 3주기 탈핵 결의 정의당 기자회견'에서 천호선 정의당 대표(오른쪽)와 당 관계자들이 탈핵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현재 새정치민주연합의 공동 대표가 된 안철수 의원은 일단은 과거 자신이 언급했던 ‘다당제가 가능한 제도 개선안’을 잊지 않겠다고 기자들에게 말한 상황이지만, 이제는 본인과 이해관계가 무관한 사안에 대해 얼마나 정치력을 쏟을지에 대해선 큰 기대를 하기 힘든 상황이다. 정의당 등 군소정당들은 계속해서 거대양당에게 제도개선을 요구하겠지만, 그 요구의 파괴력은 안철수 의원 측이 제3정치세력으로 존재했을 때에 비하면 작은 편이라고 판단할 수 있겠다.
제도개선의 문제는 안철수 측과의 연합을 고민할 수 있었던 정의당 뿐만 아니라 원외정당인 노동당과 녹색당에게도 중요한 문제다. 두 정당은 2012년 총선에서 2%의 득표율을 넘지 못하여 재창당한바 있다. 두 당을 재창당하게 했던 법적 규정은 헌법재판소에서 위헌심판을 받아 소멸된 상황이지만, 비례대표의 비중이 크지 않은 현행 제도에서 두 정당이 원내 진출을 하는 것이 녹록치는 않은 상황이다.
2014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노동당 측은 광역의원에 되도록 많은 이들을 출마시켜 정당의 인지도를 높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반면 녹색당 측은 비교적 세가 강한 지역의 기초단체장 선거의 당선을 노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노동당 사정을 아는 한 관계자는 “흔히 (노동당더러) 정의당과 합당하면 어떻겠느냐고 얘기들을 하지만, 민주노동당이 분당될 때 민주노동당에게도 진보신당에게도 오지 않은 노동계 쪽 세력과의 연대 및 화해가 더 우선시되는 상황이다. 그 사람들 없이 정의당과 합당하는 것만으로는 과거 민주노동당으로의 회귀조차 불가능한 상황이다”라고 설명했다.
그 관계자는 “이번에는 기초선거 정당공천 폐지가 제도로서 통과되지는 않았지만 정당 활동을 제약하는 법안들이 자꾸 정치개혁의 이름으로 포장되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라면서, “정치개혁한다고 하면서 자꾸 정당을 약화시켜 인물도 자금도 없이 정당조직과 당원을 믿어야 하는 진보정당 운동은 계속해서 더 힘들어지는 악순환이 있다”라고 비판했다.
현재 그러한 흐름의 선봉에 안철수가 서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물론 김대중과 노무현 등 과거 야권의 거물급 정치인들도 필요에 따라 기성 정당을 부수고 자신의 구미에 맞는 정당을 만들어 갔던 전력은 있다. 하지만 안철수의 경우 그들처럼 새로운 정당을 제대로 장악할 가능성도 많지 않아 보이는데, 제도적인 측면에서의 정당의 약화를 선도하고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제3세력’의 깃발을 들고 진보정당들의 숙원이었던 제도 개선의 가능성을 높여줄 것 같았던 안철수가 진보정당들의 숨통을 옥죌 종류의 정치개혁 의제를 꺼내들기 시작한 상황은 ‘문을 열어주는 듯하다가 닫아버린’ 상황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안철수는 단지 개인이 아니라 어떤 흐름일 것이며, 그의 제안이 누군가에겐 환영받는 그 사회를 진보정당 운동이 돌파해야 하는 것이겠으나, 그렇더라도 일개인의 정치적 기호에 의해 정치세력들의 지형이 요동치고 소수파에게 더 불리한 시국이 왔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더 나빠진 상황에서 지속성이 가능할 새로운 운동 모델을 진보정당들이 고민해야 할 필요가 생긴 상황이라고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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