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정말 재미있게 본 미국 드라마가 하나 있는데, 스포일러가 될 수 있겠으니 제목은 밝히지 않겠다. 다만 총총히 빛나는 별들이 가득한 밤하늘로 끝을 맺는 이 마지막 장면에서 게오르그 루카치가 쓴 <소설의 이론>의 첫 대목이 떠올랐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루카치는 이 도입부를 통해 별이 빛나는 창공에서 별자리가 엮어낸 이야기인 그리스 영웅 신화와 서사시를 소설의 기원으로, "신에게서 버림받은 세계의 서사시"로 제시하고 있다. 그런 별이 총총 가득한 하늘을 우리시대에 가장 많은 자본과 노력, 시간이 투여된 매체인 미국 드라마에서 보게 되니 기분이 묘했다. 드라마의 작가는 인터뷰(어떤 드라마인지 알고 싶은 사람만 클릭할 것 링크)에서 내 기대와는 달리 루카치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 마지막 장면이 이 드라마의 시작점이라고 언급했다. 빛나는 별들이 가득한 밤하늘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되는 것이다.

빛나는 별이 가득한 밤하늘처럼 쉰가지 소설이 담긴 책 한 권을 읽었다는 것으로 이 억지로 이어붙이기를 마쳐야겠다. 단편소설 모음집은 아니다. 대학교수 / 작가 / 예술인 50인이 선정한 소설 서평이 담긴 책이다. 오십 명 필자의 인생항해를 돕는 별자리 노릇을 한 오십 개의 소설은 국내소설 41작품, 외국소설 9작품으로 이루어져있다. 이들 중 가장 오래된 작품을 작자미상이자 집필시기 미상의 <열여춘향슈졀가>를 논외로 하고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의 주인공 도민준(김수현 분)이 극중에서 읽어 중국에까지 유명해진 서포 김만중의 <구운몽>을 가장 오래된 것으로 꼽자면 김연수의 <원더보이>(2012.02.08)를 아슬아슬하게 제친 윤정은의 <오래된 약속>(2012.03.07)이 <구운몽>의 반대편에 있다. 소설이라는 이름 아래 마흔 한개의 한국 작품들을 연도 순으로 배치한다면 삼백년 간 한국 사회의 변천사를 소설을 통해 훑어볼 수 있다.
오십 작품을 다루는 오십 필자들의 시각도 다양하다. "소설에서 작가를 발견하다”라는 제목의 1부에서 필자들은 소설의 작가를 이야기한다. <위대한 개츠비>를 쓴 피츠제럴드의 허랑방탕한 삶. 벽초 홍명희의 손자로 남한이 제정한 문학상을 최초로 수상한 북한작가이자 송혜교와 유지태가 주연한 영화 <황진이>의 원작소설을 쓴 홍석중의 탁월함. 한국전쟁 통에 월북한 아버지를 둔 가족사를 역시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소설 <불의 제전>에 녹여낸 김원일. <무진기행>과 <서울 1964년 겨울>을 쓴 김승옥은 그와 함께 60년대에 청춘을 보냈으며 그에게 반해 소설쓰기를 그만두게 된 김춘섭 교수를 통해 소설가라는 추상적인 명칭을 벗어나 생활인의 편린을 드러낸다.
2부 “소설에서 나를 발견한다”는 1부보다 더 내밀하다. 작품을 통해 필자들은 자신을 드러낸다. 여성작가 오정희의 <유년의 뜰>을 여자아이 노랑눈의 시각으로 이 작품을 읽은 시인 이경진은 작품 속에서 가부장으로 군림하면서 동생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큰오빠에게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본다. 그리고 소설을 압도하는 비극적인 가정사를 담담히 털어놓는다. 삼남매중 장남으로 태어나 참 같은 거짓을 압도하는 참을 이처럼 담담히 소환하는 것도 소설의 힘이자 역할 아닐까. 소설가 김병용은 그 내용이 너무 심심하여 “이런 작품도 소설이라고 하나?”라고 반문했던 중학교 시절의 <설국>과의 첫 만남을 토로한다. 그러나 눈처럼 쌓여가는 세월 속에서 <설국>은 점점 더 그 깊이를 더해가고 김병용은 2004년 겨울 아타미행 야간 기차에 앉아 다시 <설국>의 첫 세문장을 되뇌기 시작한다. 예순을 넘긴 김정호 교수는 카스 매컬러스의 <슬픈 카페의 노래>를 소개하면서 좋은 남편과 좋은 아버지가 되지 못한 자신을 반성하면서 아내와 아들들에게 사랑의 메시지를 수줍게 전한다.
3부 “이 소설을 말한다”에서는 작가도 필자도 부각되지 않는다. 하지만 소설이 드러내는 시대와 시대 속에서 만들어진 소설에 대한 건조한 이야기도 충분히 흥미롭다. "당시(숙종대) 사대부 남성들이 상상도 하지 못했던 평등 지향적 의식”을 드러낸 <구운몽>의 김만중은 그래서 이상구 교수로부터 “'김만중은 우리나라의 셰익스피어’란 말이 과장된 것만은 아닌 셈”이라는 평가를 얻는다. 이태영 교수는 <열여춘향슈졀가>에서 ‘향단’이 없고 대신 ‘상단’이 등장하는 이유를 흥미롭게 풀어낸다. 정하영 교수는 벽초 홍명희의 <林巨正(임꺽정)>이 온갖 수난을 겪고 한국문학사의 살아 있는 고전이 되는 과정을 작가의 삶과 함께 소개한다. “사건이나 인물이나, 묘사로나 정조로나 모두 남에게서는 옷 한 벌 빌어 입지 앟고, 순조선 것으로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조선 정조에 일관된 작품, 이것이 나의 목표였습니다.”라는 홍명희의 결의가 "충실히 실현”된 <임꺽정>이 미완성으로 끝나게 된 이유도 알 수 있다.
4부 “나는 이렇게 읽었다”와 5부 “소설은 늘 우리 곁에 있다”에서도 쟁쟁한 작품들에 대한 필자들의 애정어린 고백과 분석들이 이어진다. 베스트셀러로는 <태백산맥>과 같은 국민적 베스트셀러부터 재미에 집중하여 깊이를 놓친다는 장르소설에 대한 편견을 재미 뿐 아니라 깊이와 통찰로 돌파하며 베스트셀러가 된 <7년의 밤>이 언급되고 여전히 아는 사람들은 극찬하나 모르는 사람들은 통 모르는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를 비롯한 쟁쟁한 한국소설의 걸작들이 이어진다. 이미 읽은 작품에 대한 글에는 공감을 하기도 하고 다른 시각을 확인하기도 한다. 이름과 평가만 흘려듣고 아직 읽지 않은 작품에 대한 호기심과 경외심도 더 깊어간다.
소설을 사랑하는 다양한 세대의 필자들이 자기 인생의 가장 강렬했던 순간들을 함께하며 깨달음의 순간이나 나아갈 방향을 전해준 소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읽는 경험은 한 필자가 여러 책을 이야기하는 다른 서평집들과는 또 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한 명의 필자가 대명천지에 하나의 태양처럼 책 전체를 장악하고 군림하는 서평집과는 달리 각기 다른 크기와 밝기를 가진 별들이 별자리처럼 저마다의 형태로 배치된 밤하늘처럼 느낀다. 다른 서평집처럼 아무 페이지나 내키는 데로 펼쳐 읽을 수 있지만 다양한 필자들의 인생과 지식이 소설을 매개로 녹아있는 이 책 앞에서 쏟아질 듯한 별들 가득한 밤하늘을 바라볼 때 어쩔 수 없이 분산되는 시선의 경험이 떠오른다. 그래서 우후죽순, 중구난방을 긍정적인 의미로 칭찬의 뜻으로 꾸밀 수 있는 이 책을 소개하는 글은 빛나는 별들이 가득한 밤하늘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되었다.

최원택

드라마 잡지 <드라마틱>과 장르소설 잡지 <판타스틱>의 기자를 거쳐 책 만드는 일을 하다가 곧 자유낙하가 멀지 않은 자유기고가가 되었다. 허영에 휘둘려 책장을 넘기고 마우스를 클릭하다가 깜냥을 확인하는 것도 우직하게 반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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