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의 여신 유스티치아가 든 '칼'과 '저울'은 '엄정함'과 '공정성'을 상징

정의(正義)란 뜻의 영어 단어 ‘Justice’는 로마 신화에 나오는 ‘정의의 여신’ 유스티치아(Justitia)에서 나왔다고 한다. ‘법의 상징’으로 불리는 여신 유스티치아는 그리스 신화의 정의의 여신인 디케(Dike)에 비유되는데, 한 손에는 ‘칼,’ 다른 한 손에는 ‘(평등의) 저울’을 쥐고 있다.

저울은 ‘법의 형평성’을 표현하고 있고, 칼은 법의 집행에 있어 엄격함과 엄정함을 표현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독일 등 유럽의 몇몇 도시 광장에 서 있는 정의의 여신상은 대개 눈을 가리는 띠를 두르고 있거나 눈을 감고 있는데, 이는 법의 집행, 즉 저울질을 할 때 주관성을 배제해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우리나라 대법원과 대검찰청도 잇따라 청사에 홍보전시관을 마련하고 국민을 상대로 '선의의 홍보전(戰)'을 펼칠 계획이라고 한다. 대법원은 오는 9월까지 청사 동관 1층에 661㎡ 규모의 홍보전시관을 만들 계획을 지난 달 발표한 바 있는데, 역시 정의의 여신인 유스티치아 상을 설치할 것이라고 한다.

▲ 정의의 여신을 형상화한 법원 엠블럼.

그런데 사법부와 검찰의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제(20일) 서울행정법원 제13부(재판장 정형식, 판사 장찬, 허이훈)는 정연주 KBS 사장이 이명박 대통령을 상대로 제기한 해임처분 집행정지 (가처분)소송을 기각하면서 관련 법령과 일반적인 재판 관행에 어긋나는 결정문을 내 놓아 법조계 안팎의 비판과 논란을 사고 있다.

현행 방송법에서는 대통령의 KBS 사장에 대한 면직권이 명문화되어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감사원과 KBS 이사회 등의 해임 권고 및 제청 등을 받아들여 해임한 것 자체가 합법이냐 여부는 곧 정식 재판에서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정 사장의 해임처분무효 소송 사건(2008구합32317호)에 대한 서울행정법원의 정식 판결이 내려질 때까지 일시적으로 효력정지를 요구한 일종의 가처분 소송을 기각하면서 서울행정법원 재판부가 내놓은 결정문이다.

우선 결정문 전문을 보자.

주문: 이 사건(2008아2137 집행정지)을 기각한다.
신청취지: 피 신청인(대통령)이 2008. 8. 11. 신청인에 대하여 한 해임처분은 위 당사자 사이의 이 법원 2008구합32317호 해임처분무효 사건의 판결확정시까지 그 효력을 정지한다.
이유: 신청인 제출의 소명자료에 의할 때, 위 해임처분으로 인하여 신청인에게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가 발생할 우려가 있어 이를 예방하기 위한 긴급한 필요가 있다고 인정되지 아니하므로, 이 사건 신청을 기각하기로 하여 주문과 같이 결정한다.


이 결정과 결정문과 관련 다수의 법률전문가들이 제기하는 문제점은 한 두가지가 아니다.

첫째, 기각 ‘이유’를 단 석 줄로 표현하고 있는데, 게다가 법령과 법리에 따른 ‘진짜 (기각)이유’는 전혀 밝히지 않았다는 점이다. ‘법원의 모든 판단과 결정’에는 이유를 붙이게 되어 있다고 한다. 그것이 또한 법관과 정치인, 판결과 정치적인 결정 및 판단과의 다른 점이다.

이번 재판부의 기각 결정문에는 ‘관련 사실과 법리에 따른 타당하고 구체적인 이유’를 적시했어야 하는데 전혀 그런 설명이 없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변호사는 “문제의 결정문만 놓고 보면, 이번 재판부는 법률가나 판사가 아니라 정치가와 같은 결정이나 결단을 내린 것이나 다름없다”고 비판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이 변호사는 “정치가의 판단은 이런 식으로 내릴 수 있지만, 판사의 결정과 판단은 이래서는 안된다. 판사의 결정이나 판단이라고 볼 만한 값어치가 전혀 없다”고 혹평했다.

이 변호사는 “민사소송법에 따르면, 판사의 판결이나 결정이 '이유불비(理由不備),' 즉 이유를 적시하지 않거나 불충분할 경우나 ‘이유모순(理由矛盾),’ 즉 이유가 서로 모순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면 항소 혹은 원심파기 사유가 된다”며, 이번 재판부의 결정은 ‘이유불비’에 해당되는 결정적인 하자가 있는 결정이라고 비판했다.

둘째, ‘위 해임처분으로 인하여 신청인에게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가 발생할 우려’와 관련해 이를 예방하기 위한 긴급한 필요가 인정되지 않는다고 판단하면서, 신청인에게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가 무엇인지도 적시하지 않았다.

방송법에 따르면, 면직권을 갖고 있지 않은 대통령이 감사원과 역시 해임 제청권을 갖고 있지 않은 KBS 이사회의 해임제청 결정에 따라 KBS 사장이 해임 결정을 받아 사장직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는데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가 발생할 우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판단은 어떤 법리와 근거에 따른 것인가?

KBS 이사회는 대통령의 해임결정 직후 후임 사장 선임절차에 돌입한 바 있고, 후임 후보 추천날짜까지 보도되고 있는 마당에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가 발생할 우려’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어떤 것이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가 발생할 우려’에 해당하는지 사례나 비유를 들어 법리적으로 설명했어야 한다.

세번째 문제는 더 심각하다. 재판부는 결정문에서 밝히지 않은 ‘기각 이유’를 기자들에게 설명했다는 사실이다. 재판부는 기자들에게 “현재 제출된 자료로 볼 때 대통령의 해임이 위법하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말한 것으로 언론은 보도했다.

흔히 “재판부는 판결로 말한다”고 한다. 재판부가 기각 이유를 전혀 적시하지 않아 결정적인 하자가 있는 결정문을 내놓고, 정작 진짜 기각 이유를 기자들에게 설명하는 것이야말로 법관의 자격을 의심케 하는 일로 비난받아 마땅하다.

특정 사건에 대한 법원의 결정이나 판결이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는 별개다. 최소한 판결이나 결정문은 법리와 사실에 따라 설득력 있게 쓰는 것이 판사의 기본 아닌가?

다시 정의의 여신 유스티치아로 돌아가자.

유스티치아가 양손에 들고 있는 ‘칼과 저울’은 서로 배타적인 개념이나 기준이 아니다. 절차적 정당성과 판결(결정) 내용의 타당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수도 있고,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으로 볼 수도 있다. 칼로 상징되는 엄정성과 저울로 상징되는 공정성, 이 두 가지 모두를 충족하지 못하는 판결은 당사자를 설득하지 못하며, 이런 것이 누적되면 법의 지배와 법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게 된다.

서울행정법원 본안 소송 재판부는 ‘법과 양심에 따라 엄정하고 공정한 판결’을 내리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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