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처 몰랐습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엔딩이 그리도 가슴에 사무칠 줄은. 언제나 유쾌하고 기발하게 동화적 연출을 과시했던 웨스 앤더슨의 특성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여전했습니다. 그의 영화를 말할 때 끊이지 않고 언급하는 단어인 '미장센'도 훌륭했습니다. 특히 이번에는 화면비까지 넘나들면서도 가득 메운 무대를 보면 기가 막히게 아름다웠습니다. 화면비의 변화는 연출과 촬영 등에 있어 커다란 고심을 안겨주는 요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웨스 앤더슨은 마치 화가처럼 쓱삭쓱삭 영상을 맘껏 요리하고 있습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웨스 앤더슨의 전작과 다른 점이 있다면 '잔인하다'는 것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그의 영화 중 가장 잔인합니다. 18세 이상 관람가를 받았을 때부터 의아했는데 직접 보니 왜 그런지 알겠더군요. 몇 장면 때문에 청소년이 자유롭게 관람할 수 없다는 건 아쉽지만, 분명 웨스 앤더슨의 선택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이 영화가 무얼 말하고 있는지, 웨스 앤더슨이 관객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게 무엇인지를 고려하면 그렇습니다.

가상의 국가를 배경으로 하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시대의 종말과 함께 사라진 낭만과 예술에 보내는 웨스 앤더슨의 애수로 가득한 찬가였습니다. 영화를 보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끝내 무너졌습니다. 예술적 활기와 빛을 화려하게 발산했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냉기와 공허함만이 남았을 뿐이었습니다. 제목과 주인공 캐릭터의 이름 그리고 마담 D의 외형을 볼 때, 웨스 앤더슨은 아마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절이 과거 유럽의 예술적, 문화적 전성기였다고 본 것 같습니다. 구스타프 클림트와 더불어 극 중에 등장하는 레즈비언 그림의 원조(?)인 에곤 쉴레가 생존했던 시기기도 합니다. (그 그림은 에곤 쉴레의 솜씨인 것 같긴 한데 처음 보는 것이라서 뭔가 하고 찾아봤더니, 에곤 쉴레 스타일로 리치 펠레그리노라는 미술가가 창작한 것이라고 합니다) 1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쇠락했던 것과는 달리 영화 속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전성기는 계속됐습니다. 이걸 보면 웨스 앤더슨이 이 영화를 제작하는 데 큰 영감을 줬다고 하는 스테판 츠바이크의 생애와 겹치게 한 것도 같습니다.

웨스 앤더슨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시간배경으로 2차 대전을 전후로 삼은 건 영화가 뭘 말하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에 무스타파를 아랍 소년으로 설정한 것, 어머니의 유산을 노리는 사악한 아들과 킬러에 반하여 무스타파와 구스타브가 가지는 연대감, 결말부에 기차에서 벌어지는 사태, 이때 구스타브가 내뱉는 대사를 통해서도 웨스 앤더슨의 속내를 읽을 수 있습니다. 자본과 파시즘의 출현은 예술과 문화와 인간성을 말살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이렇게 할 수 있는 감독이 웨스 앤더슨 외에 달리 누가 있을까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그의 영화로는 다소 잔인하긴 하지만, 무고한 인간을 억압하고 배척했던 폭력의 본질을 드러내는 데는 필요불가결한 것이었습니다. 이와 더불어 구스타브를 마냥 선한 인물로 다루지 않고 허세가 다분하게 묘사한 것도 지극히 그다운 냉소적 유머였습니다.

결말에 이르러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예기치 못한 잔영을 제 가슴 속에 남기고 퇴장했습니다. 어쩌면 구스타브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혹은 존재할 수 없었던 걸지도 모른다는 의미의 말이 상념에 잠기게 했습니다. 그제서야 굳이 웨스 앤더슨이 화면비를 번갈아가면서 적용한 것과 예의 정면을 바라보는 인물 등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보는 관객에게 끊임없이 "이건 영화다"라는 걸 깨우치게 하고 싶었던 도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보통 영화는 관객을 대상으로 현실을 가장합니다. '5도의 법칙'이라고 해서 영화 속 인물이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지 않도록 하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훔쳐보기'를 전제로 하기 마련인 영화의 관객에게 불편을 발생시킬 수 있고, 동시에 현재 보고 있는 것이 '영화'라는 걸 인지하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웨스 앤더슨은 언제나처럼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동화와도 같이 꾸미고 수시로 관객에게 눈길을 보냅니다. 화면비 또한 당대의 영화에서 주를 이뤘던 걸 고스란히 차용한 것과 함께 계속해서 변화를 주면서 의식하게 합니다. 이는 곧 우리가 사는 현실과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이야기는 전혀 관련이 없다는, "이건 가상의 판타지 영화다"라는 걸 거듭 강조하는 것에 다름 아닐 것 같습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도입부에서 어떤 여성이 읽는 책을 통해 들어가, 다시 작가의 셀프 카메라 인터뷰를 거쳐, 그가 젊은 시절에 무스타파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라는 걸 전달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건 마치 구스타브처럼 어쩌면 존재하지 않았고 그저 누군가가 지어낸 것일지도 모르기에 우리의 현실은 아니라는 의미가 아니었을까요? 물론 굉장히 자의적인 해석이지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더 애잔하게 다가왔습니다.

★★★★☆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