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계획하는 일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의 감정 상태와 비슷하다. 그가 자꾸 생각난다. 마구 보고 싶다. 그가 보내준 문자를 하릴없이 들여다보듯이, 휴가를 낼 날짜를 가늠해보기 위해 달력을 이리저리 넘겨본다. 일하다가 멍하니 그 사람 생각을 하듯이, 업무 내용이 펼쳐진 파일을 뒤로하고 여행사 사이트에 방문한다. 어쩔 수가 없다. 무척 설레는 마음을 진정시키는 것은 설레게 하는 대상에게 더 깊이 빠져버리는 것뿐이니까. ‘그가 날 좋아하는 걸까’ 하고 헷갈려 하는 마음은 ‘그때 휴가를 낼 수 있을까’ ‘비행기 편은 있을까’ 하고 걱정하는 마음과 어쩜 이리 똑같은지.

그러다 구체적인 계획이 서서 비행기 티켓팅이라도 하는 날엔 그 사람이 내게 사귀자고 고백한 것처럼 미친 듯이 심장이 뛴다. ‘그 사람이 날 사랑한다!’라는 문장과 ‘휴가계 냈다!’라는 문장은 내게 같은 뉘앙스로 읽힌다.
내게 열렬한 사랑의 감정을 일으켰던 도시는 도쿄였다. 그곳에 가려고 마음먹었던 것은 <아트, 도쿄>라는 책 때문이었다. 사실 도시 전체가 박물관인 교토를 언제나 이상적인 여행지로 생각했기 때문에, 나에게 도쿄는 서울이나 홍콩, 상하이와 다르지 않은 도시였다. 하지만 <아트, 도쿄>를 다 읽고 나자, 나는 도쿄에 가고 싶어 몸이 근질거렸다.
도쿄예술대학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전공한 유학생 부부가 들려주는 도쿄 미술관 기행인 <아트, 도쿄>는 도쿄에서 반드시 들러야 할 미술관과 ‘지금의 도쿄’를 느낄 수 있는 아트 플레이스들을 자세히 안내하는 책이다. 여기에 미술관에서 만날 수 있는 일본 근현대 미술을 단순히 소개하는 것을 넘어서 예술의 사랑하는 도시 도쿄의 일상을 자분자분 들려준다. (이 책을 접한 사람 대부분이 이야기하듯이) 이 책은 여행 책치고는 꽤 두툼하다. 당연하다. 도쿄 우에노로 신혼여행을 왔던 부부가 10개월 후 우에노에 위치한 도쿄예술대학으로 미술사를 공부하러 온 데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여행이 일상이 되어버린 유학생 부부의 도쿄에서의 나날들이 무미건조할 수도 있었던 도쿄 미술관 여행기에 윤기를 돌게 한다. 대신에 페이지가 많아졌다. 저자 부부의 든든한 파트너가 되어준 사진작가의 멋진 사진이 대거 들어가면서, 또 페이지는 더 늘어났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페이지에 상관없이 정신없이 읽어 내려갔다. 무엇보다 훌륭한 에세이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저자 부부의 하모니를 감상하는 일은 꽤나 즐거웠다. 두 사람이 쓴 꼭지 글이 교차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책날개에 프로필을 따로 적지 않은 것처럼, 마치 이 한 권의 책을 두 사람이 한 붓을 잡고 쓴 글처럼 여겨진다. 물론 글에 익숙해지면 누구의 글인지 꼭지 마지막 이름 표시를 보지 않아도 알게 되지만, 그건 하루의 낮과 밤이 다른 것과 비슷하다. 문체와 감성은 다르지만 그것의 바탕이 되는 기질과 감각은 빼닮았다. 마치 낮과 밤의 경계가 확연하지 않듯이, 두 사람 사이에 선을 긋기란 쉽지 않다.
들어가는 말에서 저자 중 한 명이 표현했듯이, 이 책은 ‘가상 여행’을 위한 책이다.
“점차 마음속에서 이 책은 좀처럼 여행을 못 가는 사람들을 위한 여행서가 되어버렸고, 매번 한국에 원고를 보낼 때마다 분량을 줄이기 어려워졌다. 어쩌면 여행을 못 오게 될 독자들에게 가상 여행을 선사하기 위해서는 도시에서 사라져가는 건축(오모테산도 힐즈), 12년 만에 보내는 사랑의 편지(다케히사 유메지 미술관), 오가타 코린이 도시락을 강에 떠내려보낸 이유(네즈 미술관), 원숭이 섬(요코스카 미술관)과 숟가락을 정확하게 발음하는 그녀(후루도구 네그라)까지 소소한 이야기를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페이지가 늘어나버린 것에 대해 다소 변명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말이지만, 이런 섬세한 배려 덕분에 나는 정말 도쿄에서 여행하고 있는 것처럼 이 공간 안으로 빠져들었다. 다케히사 유메지 미술관에 가서 ‘유메지식 미녀’들을 만나고 와야겠다, 우키요에 오타 기념미술관에 가서 책으로만 봤던 우키요에를 섭렵해야지, 오가타 코린이 그린 연자화도 병풍이 그렇게 압권이라니 두 눈으로 꼭 보고 싶어, 고토 미술관에 가기 전에는 <겐지모노가따리>를 정독해야겠구나, 야네센 로지를 산책하며 도쿄의 젊은 아티스트들을 만나고 싶다…….
그렇게 책을 다 읽고 났을 때, ‘도쿄에 가면 여긴 꼭 가봐야지’ 하고 귀퉁이를 접은 페이지가 너무 많아서 헛웃음이 날 정도였다. 책의 맨 뒤편에 마련되어 있는 부록을 들고 모든 미술관 리스트를 다 체크하며 도쿄를 돌아다녀야 할 판이었다. 그렇게 나는 도쿄를 사랑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 오가타 코린, 연자화도 병풍, 코린 미술관
그래서 도쿄에 가려고 했었다. 고심해서 고른 비행기 티켓팅 내역을 출력한 A4용지를 쓰다듬으며 확인하는 일도, 호텔을 고르는 일도, 무수한 블로그 여행 후기를 훑는 일도, 여행서를 사들이는 일도 막 사귀기 시작한 연인을 만나러 나가는 것처럼 전혀 수고롭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겁쟁이였다. 처음에는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던, 방사능 유출 소식이 내내 귀에 거슬렸다. 여행을 얼마 앞두지 않는 날에도 계속 뉴스는 쏟아졌다. 나보다 동행에게 혹시 폐를 끼칠까 봐 걱정되기 시작했고 주변에서도 여행을 말렸다. 많은 사람이 지금도 도쿄에 살고 있고 즐겁게 여행을 떠나고 있는데! 불안해하는 자신이 미웠다. 마치 연인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자신에게 실망하는 기분이었다. 고작 이 정도로 나를 힘들게 한다고 해서 당신을 떠날 생각을 하다니.
“굳이 취소해야 할까? 위험을 감수하고 가야 하는 것 아닐까?”
친구는 대답했다.
“왜 행복하지 않은 연애를 끝까지 밀어붙이려 하니? 다 좋자고 하는 일이잖아.”
나는 다시 물었다.
“그 사람하고 헤어지면 내가 진짜 힘들 것 같아.”
친구는 다시 대답해줬다.
“다음에 더 좋은 여행 기회가 있을 거야.”
불발된 여행은 연인과 헤어지는 것과 비슷했다. 하나하나 그와 연결되었던 고리를 아프게 끊어내듯이 여행을 취소해야 했다. 끝없이 우울했다. 여행 가기로 한 날에 무엇을 해야 하지? 당신을 만나지 못하는 앞으로의 날들에 나는 무엇을 하죠? 나는 그렇게 도쿄를 사랑할 기회를 한 번 잃었고, 바보 같았던 나를 원망하는 중이다.

오가진

책 만드는 사람. 넓고 얕은 취향의 소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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