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에는 영화의 일부 내용이 있으니 아직 영화를 관람하지 않은 독자는 참고하기 바랍니다.

<300>만큼 그리스 vs. 페르시아 또는 서양 vs. 동양의 도식을 우월 vs. 열등 혹은 개화 vs. 야만이라는 노골적인 이분법으로 갈라놓은 영화는 찾기 힘들 듯하다. 액션 아드레날린이 솟구치게 만들고자 한다면 정치적 함의는 제로에 가까운 <트렌스포머> 시리즈 같은 팝콘 무비로 만들거나, ‘내 편은 선이요 반대 진영은 악당’이라는 논리를 백인 우월주의라는 테제로 덧입히기 편한 장르가 서부영화일 텐데 전작 <300>은 재미와 정치적인 함의라는 두 영역을 모두 건드리는 과감함을 보였으니 말이다.

<300: 제국의 부활>에서 페르시아의 함선이 움직일 때 노를 젓는 이들은 유색인이다. 그런데 그들의 등은 멀쩡하지 않다. 채찍 자국이 선명하다. 페르시아 감독관에게 채찍질을 당하며 노를 저어서 등이 멀쩡하지 않은 게다. 그만큼 페르시아가 노예를 관대하게 다루지 않았으며 폭력과 야만의 제국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그런데 영화의 논리대로 노예가 있던 국가가 페르시아만일까에 의문이 들지 않는가. 그리스 역시 노예제가 있었음에도 노예에 대한 혹독한 대우를 그리지 않는다는 건 페르시아가 야만의 제국이라는 걸 역하지각으로 보여주기 위한 영화적인 술책이다. 에바 그린이 연기하는 아르테미시아에게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가 따귀라는 폭력을 행사하는 것도 페르시아가 얼마나 폭력에 기인한 제국인가를 보여주기 위한 연출일 테다.

아르테미시아는 그리스 출신임에도 그리스에 대한 증오를 거두지 못하고 ‘그리스 타도’를 위해 그리스와는 적국인 페르시아를 위해 충성하는 인물이다. 그가 어린 시절 죽지 않고 목숨을 연명할 수 있던 건 어린 아르테미시아를 착취할 수 있어서다. 헌데 노동력 착취가 다가 아니다. 어린 아르테미시아에게 한 남자가 다가서더니 웃옷을 내린다. 이는 그리스 남자가 아직 미성년자인 아르테미시아에게 성적인 욕망을 갈구했음을 암시하는 시퀀스다.

조국 그리스에 칼날을 겨누는 아르테미시아를 향해 ‘마녀’ 운운하는 그리스 군인들의 대사는, 그리스에게 육체와 정신적으로 학대당한 아르테미시아가 왜 조국에게 등을 돌렸는가 하는 원인은 간과한 채 아르테미시아를 정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전편에서 스파르타를 배신한 곱사등이 에피알테스가 조국 스파르타를 등졌나 하는 사연 역시, 스파르타가 장애우를 군인 취급하지 않아서 벌어진 일 아니던가. 이처럼 <300> 시리즈는 왜 그리스 국민이 조국인 그리스를 등지게 만들었는가에 대한 원인보다는 조국을 등졌다는 ‘결과’에 천착한다.

페르시아를 야만의 제국으로 보게 만드는 이유는 이뿐만이 아니다. 페르시아 함선에서 건장한 사나이들이 바다를 향해 뛰어든다. 그들의 등에는 하나 같이 자루가 달려 있다. 이들의 목적은 그리스 함선에 침투하는 것, 그리스 함선 갑판에 페르시아 군인이 오른 것을 본 아르테미시아는 별안간 아군인 페르시아 군인의 등에 달린 자루를 향해 불화살을 겨냥한다.

페르시아 군인의 등에 달린 자루의 정체는 기름을 한 가득 실은 기름 자루, 오늘날 알 카에다 혹은 아랍 과격분자들의 자살 폭탄 테러를 연상하기에 충분하다. 살라미스 해전이라는 역사적 사실 위에 오늘날의 아랍 문명이 예나 지금이나 얼마나 야만적인가를 상상력으로 덧입히는 시퀀스 아니겠는가. <300>의 서구 우월주의적인 시선, 혹은 백인 우월주의 사상은 속편에서도 꾸준히 계승되고 있다. 이는 프랭크 밀러의 그래픽 노블을 알고 모르고의 차이를 넘어서는, 백인 우월주의와 서구 우월주의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영상 프로파간다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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