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복한 부시 불행한 세계' 책표지
지난 2003년, 마이클 무어가 부시의 재선을 막아보겠다며 자신의 책 <이봐, 내 나라를 돌려줘>에서 제시한 여러 처방 가운데 하나는 다름 아닌 ‘불온서적’ 퍼뜨리기! (책읽기를 몹시도 싫어하는 부시조차도 <렉서스와 올리브나무>의 저자인 신자유주의의 전도사 토머스 프리드먼의 책은 좋아한단다.) 본래 ‘짧지만 행복했던 부시의 정치 역정(The short but happy political life of BUSH)’이라는 제목을 가진 이 책을 마이클 무어는 “주위의 친구와 가족, 그리고 당신의 보수파 가족들에게” 돌리라며 “제정신이 박힌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면 마이클 무어의 민병대 크기를 늘려줄 많은 유용한 정보들이 들어 있다”고 썼다. 저널리스트인 두 저자들은 (부시를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2000년 대선 직후에 발표한 이 책을 위해 무려 6년 동안이나 (부시가 대통령이 되기 직전까지) 부시의 정치 역정의 실체를 밝혀줄 객관적 증거로서의 ‘기록’을 추적했다고 토로하고 있다.

그리고 그 기록이 전하는 사실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초라하다. 아들 부시는 막강한 실력자인 아버지를 둔 덕택에 150명이 넘는 대기자를 제치고 텍사스 주 방위군(Texas National Guard)에 입대했고, 특권층 자제들로 넘쳐나는 부대에서 전투기 조종사가 되었지만, 베트남전 당시에 육군 복무 자격시험에서 낙제한 젊은이들을 베트남으로 보내기 위한 ‘10만 계획(Project 100,000)’이 미국에게 충분한 병력을 보충해준 덕분에 미국 본토에 ‘안전하게’ 남아 있을 수 있었다. 너무 뻔한 얘긴가. “그는 하원의원의 아들이었기에, 미 상원의원의 손자였기에, 그리고 국가 최고의 사회적·경제적 특권층의 일원이었기에 베트남전에서 가볍게 벗어날 수 있었다.” 증언에 의하면 아버지 부시의 친구였던 에드가라는 인물이 부시를 방위군에 집어넣기 위해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 분명했지만, 이 사건에 관한 질문에 부시는 만국의 정치인들이 너무나도 사랑해 마지않는 수사(修辭)를 동원해 이렇게 대답했다. “잘 기억나진 않습니다만 그랬을 것 같진 않군요.”

정치인이 되기 전, 역시 아버지의 후광을 입어 고향 텍사스에서 유전사업에 뛰어든 부시는 사업적으로는 실패자였다. 남부러울 것 없이 든든한 정치적 배경 덕택에 아르버스토 에너지, 부시 시추회사, 스펙트럼 7, 하켄 에너지로 이어지는 부시의 투자사엔 끊임없이 (정치적 이득을 염두에 둔) 기업들의 자금이 흘러들었지만, 족족 쓰러져가는 회사를 되살릴 길은 없었다. 문제는 부시가 손댄 모든 회사들이 나가떨어지는 와중에도 정작 부시는 돈을 잃기는커녕 오히려 한 푼도 손해 본 것 없이 자기 몫을 챙겼다는 데 있다. 기록은 1990년 6월, 부시는 하켄 에너지가 부도 위기를 맞았다는 소식이 알려지기 전에 갖고 있던 주식을 얼른 처분하고도, 증권거래위원회의 규제를 어기고 주식 매각 사실을 이사회에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리고 3년 뒤, 주지사 선거전에서 이 사실이 문제가 되자 부시는 새빨간 거짓말을 했다. “증권거래위원회에 필요한 보고서를 제출했으며, 거기서 그것을 잃어버린 것이라고 우겼다.”

▲ 몰리 어빈스

1994년 부시와의 주지사 선거 대결에서 패배한 민주당 후보 앤 리처즈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부시는 은닉된 무기 합법화에 매우 강력한 지지를 표했고, 이 부분에 서명했습니다. 나는 양심상 그 선을 넘을 수 없었고, 그는 그 선을 넘어 주지사가 됐죠.” (총기 허가가 미국사회에 끼친 해악에 대해서는 마이클 무어의 책에 나오는 ‘사실들’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부시는 자기 스스로 떠들고 다닌 ‘젊은 날의 무분별함’에 대해 훗날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했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이야기하는가’라는 새로운 개념”을 이야기했다. (이 대목이 인용된 장에는 ‘승자의 날개 밑으로 헤쳐모여!’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주지사 시절 부시는 재해대비기금을 없앴고, 저소득층과 마약중독자들에게 ‘저세 저혜택’ 정책을 적용해 연금을 주지 않으려 했으며, 원유 가스정을 소유한 ‘엑손’과 같은 대기업을 위해 획기적인 감세안을 내놓았다. ‘오염왕국’이라는 오명을 써야 했던 텍사스의 주지사 부시는 재앙과도 다름없는 수질 오염에도 불구하고 주 당국의 수질검사 자체를 아예 중지했고, 살충제 감시 프로그램도 한동안 등한시했으며, 전임 주지사가 임명한 텍사스 자연자원보호위원회 위원 3명을 자기 입맛에 맞는 인물들로 교체해버렸다. 미국의 다른 주들이 폐기물 규제를 강화할 때 도리어 관련 규제를 완전히 폐기했고, 오염물질 통제 권한을 ‘업계 자율’에 맡겼으며, 그 덕분에 텍

▲ 부시 대통령, 영화 포스터 패러디
사스는 온실효과의 주원인은 이산화탄소 배출 부문에서 미국 최고를 달렸다. (부시 재임 시절 텍사스의 환경 재앙을 다룬 이 섬뜩한 장에는 ‘어때, 숨 쉴 만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저자들은 부시가 심한 지진아로 일급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 대해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주는 대신 사형을 금지하는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다는 사실을 소개하면서, “이 법안은 ‘인정 많은 보수주의’를 보여주는 완벽한 실례였다.”고 평가했다.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 부시의 정치 역정을 ‘기록’에 근거해 분석한 저자들이 내린 결론은 이렇다. “결국 부시의 제안들은 민주주의의 종말을 의미했으며, 부자에 의해 지배되는 정치·사회로의 전환을 의미했다.” 하지만, 저자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두 번이나 미국 대통령 임기를 채운 부시는 어느덧 백악관을 떠날 날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도 이 철지난 얘기를 책이 발간된 지 8년이나 지난 지금 굳이 복기(復碁)하는 까닭은 분명히 있다. 28년 전으로 돌아간 한국 민주주의의 시곗바늘. 수많은 평범한 시민들과 언론인들이 무소불위의 공권력에 맞서 거리로, 거리로 뛰쳐나가는 냉혹한 2008년 대한민국의 현실. 굵은 글씨들이 되살리는 기시감(旣視感). 데·자·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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