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연일 시민사회 운동가로서 정세에 무기력한 스스로의 모습에 부끄럽고 짜증이 난다. 인터넷으로 뉴스를 검색하기가 두렵기도 하다. '잃어버린 10년'을 외치는 세력이 자행하는 역사를 거스르는 행위를 어떻게 대응해야 하고 또 과연 대응 자체가 가능한가라는 자괴감이 들기 때문이다.

▲ 촛불들의 축제 맑시즘2008(www.marxism.or.kr) 홈페이지 캡쳐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을 다룬 기사 하나가 눈에 뛴다. 한 인터넷 신문의 <고려대, 촛불관련 학술행사 불허 말썽>이란 기사다. 사회단체 ‘다함께’가 8월 14일부터 17일까지 진행하는 학술행사 '맑시즘 2008-촛불들의 축제'를 고려대 당국이 불허하겠다는 내용이다. 고려대 홈페이지에 게재된 학생처장과 총무처장 명의의 13일자 안내문은 불허 근거로 ‘학생들의 면학 분위기를 보호하고 학칙을 준수하는 학교의 엄정한 입장을 보이기 위해서’라고 밝히며 ‘주최 측이 행사를 강행할 경우 행사건물의 수도, 전기, 네트워크의 불능화 조취를 취할 예정’이라고 한다.

과연 어떤 행사이기에 학생들의 면학 분위기를 헤친다는 것일까? '맑시즘2008-촛불들의 축제'는 촛불 운동의 주도적 참여자들, 국내외 반전·반신자유주의 활동가들, 진보적 지식인들이 강연하고 토론하는 포럼이다. 이런 포럼이 학생들의 면학 분위기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세상이 다 웃을 일이다. 고려대 학생처장과 총무처장의 궁색한 불허 근거가 오히려 측은하기까지 하다.

궁색한 불허 근거가 가릴 수 없는 진실은 곧 확인된다. ‘맑시즘2008-촛불들의 축제’ 공식 홈페이지는 학교 당국이 밝히는 사실상의 불허 근거를 ‘이명박 때문에 고려대 학생이라는 게 부끄럽다고 말한 고대녀가 연사로 나와서…’, ‘토론 주제로 이명박 반대가 들어가서’라고 밝히고 있다.

동문 출신의 대통령을 반대하는 토론이기 때문에 불허하겠다고 한다. 과연 이런 주장이 대학 내에서 오고 갈 수 있는가? 고려대 당국은 학문과 사상의 전당, 진리의 상아탑인 대학이라는 가치보다는 이명박 대통령의 동문, ‘프랜드’라는 가치를 더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 한겨레신문 8월 13일자 13면
고려대 ‘포스코관’이라는 건물 안에 ‘이명박 라운지’라는 방이 있다.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기 이전부터 고려대는 학벌사회인 한국에서 명문대로서의 위신과 동문집단의 힘이 주축이 된 학벌자산을 가지고 있었다. 박노자는 학벌자산에 대해 ‘재벌들과의 유착관계 성립을 더욱 수월케 하고, 재벌들의 광고판으로서 교정의 가치를 크게 높인다’라고 지적했다. 고려대 출신인 이명박 대통령, 그는 현재 고려대가 재벌들과의 유착관계를 형성하는데 가장 큰 자산이 될 수 있다.

기득권을 가졌고 이를 유지하려는 사람의 변명을 듣자면 구구절절하고 복잡하다. 그리고 내세우는 명분과 실제 내용은 다르다. ‘이명박 반대 토론’이라는 이유로 포럼을 불허할 수 없다는 것을 고려대 당국도 분명히 잘 알 것이다.

학문과 사상이 집적되고 이를 학습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대학에서 다양한 학문과 사상의 연구 필수적이며 사회 어느 곳에서도 이를 대체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특히 학문과 사상의 자유로운 토론과 연구는 누구를 몰아내고 타도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보다 풍요롭고 행복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과정이다.

고려대 당국에 무리한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대학의 ‘정상화’이다. 당연히 정상화의 첫 출발은 학문과 사상의 자유 보장이다. 고려대가 명문대인 이유는 학문과 사상의 자유 보장을 위해 열심히 싸웠고, 더 나아가 지식인의 구체적 실천으로 권력의 독재, 사회적 소외계층과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억압에 대항한 고려대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