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에 만들어진 <로렌조 오일>이라는 영화가 있다. 아들이 불치병에 걸리지만 당시 의학으로는 아들의 질병을 고치기는커녕 병세를 늦추지도 못한다. 이에 로렌조의 부모는 아들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직접 특효약을 개발한다. 부모의 지극정성 덕일까. 로렌조는 제도권 내 기존 의학이 아닌 부모의 사랑이 빚어낸 로렌조 오일 덕에 오랫동안 가족의 곁에 있을 수 있었다.

만에 하나 로렌조가 현대의학에 의존했다면 그는 아마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의학의 한계에 좌절하지 않고 아들을 살리고자 한 부부의 의지 덕에 로렌조는 현대의학이 설정해놓은 수명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었다.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도 마찬가지다. 에이즈에 걸린 전기 기술자 론 우드루프(매튜 맥커너히 분)가 한 달 밖에 살지 못한다는 사형 선고를 받고 병원 처방에만 의존했다면 이 영화는 태어나지도 못하고, 론 역시 병원이 정한 한 달이라는 시한부 인생에서 자유롭지 못했을 테다. 하지만 론은 병원이 제시하는 치료법에 회의를 갖는다. 90년 당시 미국 병원이 제안하는 치료약 AZT는 에이즈 세포뿐만 아니라 멀쩡한 세포까지 망가뜨리는 치명적인 치료제다.

론이 병원이 제시하는 치료법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치료법을 개척한다는 건 기존 미국 의료 체계가 환자를 위한 시스템이 아니라는 걸 의미한다. 신약을 만드는 제약회사와 의료계의 커넥션은 에이즈 환자를 위한 연결망이 아니라 처방전과 제약회사 상호간의 윈-윈을 뜻하기도 하는 것이다. AZT를 처방한다는 건 환자의 수명을 연장하는 치료제의 성격을 갖기보다는 에이즈 환자가 제약회사의 주머니를 불려주는 고객의 역할을 한다는 걸 의미하기도 한다.

론을 연기하는 매튜 맥커너히의 육체는 에이즈라는 병마에 희생당하는 희생 제물을 연상하게 만들 정도로 바싹 말라 있다. 이런 그의 육체를, 당시 미국 의료계와 제약회사의 긴밀한 악어와 악어새 같은 공조 관계를 뛰어넘는 저항으로서의 테제로 읽어보면 어떨까 싶다. 제약회사와 병원에 돈은 돈대로 지불하고 건강을 축내는, 미국의 의료 매커니즘에 순응하다 서서히 죽어가는 개구리의 역할보다는 AZT라는 서서히 삶아가는 솥을 뛰어넘는 개구리와 같이 저항하는 육체로서 매튜 맥커너히의 깡마른 육체를 읽어보면 어떨까 싶다.

론이라는 캐릭터는 얼치기 약장수로 읽기 이전에, 건강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90년대 당시 의료 체계에 대한 저항의 주체로 보아야 할 듯하다. 당시 의료 치료법에 반기를 든다는 건 예민한 육체를 지니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이다. 깡마른 매튜 맥커너히의 육체는 당시의 치료법이라는 관습법이 불합리할 때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저항으로 튕겨낼 줄 아는 저항의 테제, 저항의 아이콘으로 관객에게 읽혀지기에 충분하다. 연기 이전에 깡마른 몸으로 저항의 테제를 말할 줄 아는 배우, 그가 바로 매튜 맥커너히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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