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가 신임 한국은행 총재로 이주열 전 부총재를 내정했다. 4일자 조간신문들은 이에 대하나 긍정적인 평가를 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특히 한국은행 독립성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박근혜 대통령은 31일 임기가 끝나는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의 후임으로 이주열 전 한국은행 부총재를 3일 내정했다. 청와대 민경욱 대변인은 이주열 내정자의 한국은행 관련 업무에 대한 판단력과 국제금융시장에 대한 식견, 감각 등을 높이 샀으며 조직 내 신망이 두텁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고 전했다. 2012년 3월 개정된 한국은행법에 따라 이주열 내정자는 인사청문회를 거쳐야 한다. 한국은행 총재의 임기는 4년이고 한 차례 연임할 수 있다.

새 정부 출범 2년차에 임명되는 한국은행 총재에 대해 그간 많은 관심이 쏠렸다. 아무래도 정부 정책을 충실히 집행할 사람이 임명되지 않겠느냐는 게 중론이었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한국은행 내부 출신을 임명함으로써 이러한 전망은 뒤집혔다. 한국은행 내부 인사의 경우 아무래도 금융통화정책에 있어서 보수적인 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더 크기 때문이다. 이 덕분에 청와대의 발표 직후 채권시장은 일순간 약세로 돌아서기도 했다. 정부가 비둘기파를 한국은행 총재로 임명해 금리인하에 나설 것이라는 기대가 무위로 돌아갈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 내정자에 대해 김중수 총재와 각을 세웠던 이력을 강조한 경향신문의 4일자 기사.

특히 주목받는 부분은 이주열 내정자가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에 반기를 들었던 인물이라는 점이다. 이주열 내정자는 2012년 퇴임 시 김중수 총재의 ‘글로벌 개혁’ 노선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바 있다. <동아일보>는 김중수에 각 세웠던 골수 한은맨’ 제하의 기사를 통해, <경향신문>은 ‘김중수 총재와 각 세웠던 이주열 화려한 복귀’ 제하의 기사를 통해, <한국일보>는 ‘김중수와 정반대 정통 한은맨의 귀환’ 제하의 기사를 통해 이와 같은 사실을 강조했다.

이런 이유로 이주열 내정자의 성향에 대해서는 ‘중도’ 또는 ‘매파’로 분류하는 경우가 많다. <경향신문>, <동아일보>는 위의 기사에서, <조선일보>는 ‘한은총재 후보 첫 마디 국가발전에 도움될 방법 찾겠다’는 제하의 기사에서 이주열 내정자의 성향을 매파로 분류했다.

▲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 내정자의 비(非)비둘기파적 성향에 주목한 중앙일보의 4일자 기사.

반면 <한겨레>는 ‘통화정책 밝은 정통 한은맨, 뚜렷한 색깔 없는 중도파로 알려져’ 제하의 기사에서, <중앙일보>는 ‘비둘기파 기용 예상 깬 내부 발탁, 조직 안정에 초점’ 제하의 기사에서 이주열 내정자의 성향을 ‘중도파’로 분류하고 있다.

▲ 한국은행 독립성을 강조한 동아일보의 4일자 사설.

물론 이주열 내정자가 의외로 정부정책을 뒷받침 하는 역할에 호의적일 것이라고 전망하는 시각도 있다. 한국은행 부총재 퇴임 이후 작성한 칼럼 등을 통해 기업의 역할을 강조했고 정부 정책의 공조 등에 대한 의지를 밝힌 때문이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이주열 내정자에게 한국은행 독립성을 지켜야 한다는 조언을 내놓고 있다. <동아일보>는 ‘이주열 차기 한은 총재, 청와대에 아니요 할 수 있어야’라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경향신문>은 ‘새 한은 총재가 갖춰야 할 조건’이란 제목의 사설을 통해 정부의 눈치를 보느라 시장의 신뢰를 잃은 김중수 총재의 전철을 밟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조선일보>는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이 한은 총재 내정자, 시장 동향에 예민한 촉감 발휘할까’란 제목의 사설을 통해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에 시장의 흐름을 민감하게 파악할만한 인사를 넣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사실상 기업 친화적인 인물이 금융통화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비친 것이다.

▲ 기업 친화적 인물이 한국은행의 주요 정책 결정 과정에 포함돼야 한다도 주장한 조선일보의 4일자 사설.

하지만 일각에서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중앙은행 정책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는 점 역시 평가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 연준과 일본은행 등이 적극적인 금융통화정책을 통해 자국의 경제를 지탱했던 사례가 하나의 전범이 되면서 중앙은행이 전통적인 물가안정의 목표에서 벗어나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전성인 홍익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는 지난달 20일 박원석 정의당 의원 주최로 열린 토론회에서 “새로운 한국은행 총재는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유연한 사고와 현실적인 정책대응을 추진할 수 있는 인물이 바람직하다”면서 “화폐수량설, 물가안정, 준칙주의 등 도그마에 포로가 되지 않는 유연한 사고가 필요하다”고 강조한 바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고령화 등으로 인한 디플레이션 위기가 강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중앙은행이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찾아야 한다는 지적을 내놓은 것이다.

▲ 현 경기를 디플레이션으로 판단하지 않는다는 이주열 내정자의 인식을 보도한 경향신문의 4일자 기사.

이주열 내정자는 일단 현 경제 상황을 디플레이션으로 판단하지 않는다고 발언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향신문>에 따르면 이주열 내정자는 <경향신문>과의 전화 통화를 통해 이와 같은 발언을 해 시장에서 제기하고 있는 금리인하 요구에 사실상 반대 입장을 내비쳤다고 한다. 이것이 한국은행 출신 특유의 보수적 인식에서 나온 발언인지, 아니면 객관적이고 정확한 시장 인식을 통해 나온 발언인지를 판단하려면 당분간 이주열 신임 한국은행 총재 체제에서 진행될 금융통화정책을 보다 면밀히 지켜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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