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항해 시대’라는 게임을 아시는가? 여자인 내가 비교적 쉽게 할 수 있었던 게임들은 고전 게임이었다. 나는 ‘어스토니시아 스토리’로 게임에 입문(?)한 ‘포가튼 사가’와 같은 PC용 턴제 RPG의 열광적인 플레이어였다. PC 게임 잡지가 넘쳐나던 시절이라 부록으로 증정 받은 ‘매타녀’와 ‘파랜드 택티스’와 같은 게임도 좋아했다. 쉬운 인터페이스 때문에 육성시뮬레이션도 좋아했는데 국민 게임인 ‘프린세스 메이커’시리즈, 쉽다는 이유로 남성용 연애 육성 시뮬레이션(?)인 ‘포토제닉’이나 ‘에베루즈’나 ‘두근두근 메모리얼’ 류의 게임도 열심히 했다. ‘마법사가 되는 방법’ 등의 아케이드 게임을 거쳐, ‘삼국지5’를 밤 새워 플레이한 후 동 터오는 새벽에 본 엔딩은 눈물 날 정도로 감동적이었다.

이후 ‘롤러 코스터 타이쿤’이나 ‘심즈’ 와 같은 게임으로 넘어가긴 했지만, 나에게 가장 애틋하면서도 고전 게임의 경계선의 마지막을 지키고 있는 게임은 바로 ‘대항해 시대’다. ‘스타크래프트’와 같은 실시간 전략 시뮬레이션이 등장하면서, 오락실에서 격투대전 게임을 할 만큼의 손가락 스킬이 없던 나는 빠르게 게임 플레이어에서 하수가 되어 버렸고 게임에 흥미를 잃었다. 나에게 마지막으로 할 수 있었던 게임은 ‘대항해 시대’였던 거다.
르네상스 분위기에 대한 매료는 기본이었다. 배를 이끄는 주인공들의 스토리는 설득력이 있었고, 삼국지 등장인물 이상의 ‘영웅’ 같았다. 일기토를 이기는 것보다도 지도를 완성해나가는 것의 쾌감! 사람을 모으고, 배를 수리하고, 배를 구입하고, 무엇보다도 이 게임은 교역이었다! RPG가 몹들을 때려 잡아 경험치를 쌓아 레벨업을 해야 한다면 이 게임에서 초반에 돈을 벌려면 무수히 많은 항구들을 오가며 가장 ‘이윤’이 많이 남는 품목을 찾아내 항해를 통해 사고 팔아야 한다. 한 루트만 뚫어놓으면 물가가 금방 비슷해지기 때문에 새로운 곳을 개척하며 지도를 넓힌다. 채워놓은 물자가 바닥나고 전염병이 돌면 배 안의 선원들이 죽는 패자의 플레이를 해야 한다. 그때 마음은 오로지 바람의 방향을 키보드와 마우스로 조작하며 ‘어서 항구가 발견되길’을 빌고 있을 뿐이다.
이 책 《최후의 모험가》를 읽는 마음이 그랬다. 이 책을 펼쳐든 건 순전히 ‘얻은 책’이라는 계기였다. 아무 맥락 없이 손에 들어온 책이라, 슥 - 살펴보고 치워두기엔 책이 너무나 예뻤다. 무엇보다도 표지에 있던 카피 ‘모험이 사라진 시대, 최후의 사나이’에 괜히 눈길이 갔다. 이 모험이라는게 뭐냐면 그러니까 ‘수제 열기구’인 거다. 낙하산이 크게 둘러진 표지.
“모험은 아무리 리스크를 줄인다고 해도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그것이 모험의 숙명이고.
우리가 모험에 매혹되는 이유다”
책 뒤표지에 실린 문구.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시도해본 사람들은 안다. 그 두근거림을, 두려움을. 그럼에도 멈출 수 없는 마음의 뜨거움을. 거절할 수 없는 운명에 맞서 싸우는 비장함이 아니라, 이것이 내 길임을 아는 이들의 삶의 태도는 그 숙명이 설령 죽음이나 내 온전한 삶을 요구할지라도, 판단도 하기 전에 이미 그 길을 걷게 만든다.
이 책을 쓴 이시카와 나오키는 스스로 모험을 즐기는 아마추어 모험가다. 일본에는 이런 사람들이 많아서 ‘모험/탐험’이라는 분야가 하나의 서적 분류로 자리잡고 있기도 하다. 이들은 산악 등정을 하거나, 북극점이나 남극점을 종단하거나, 이 과정을 촬영하고 집필을 하고 방송 활동을 한다. 모험가는 필연적으로 일상의 일부가 될 수 없기에, 이들에게 ‘모험가’로 산다는 건 일종의 ‘삶의 태도’다. 그것도 목숨을 건. 이들의 택하는 모험은 대체로 준비 기간에만 몇 년, 힘들게 마련한 한 번의 기회에서 벌어질지 모르는 수 많은 변수 안에서 자신의 ‘목숨’을 유지해내는 도박이므로.
이 책의 진짜 주인공은 지금은 세상에 없는 모험가 ‘간다 마치오’다. 49년생으로 급류타기로 시작해 ‘열기구 모험가’로 마음을 빼앗긴다. 열기구 라이선스를 취득하고 후지산을 넘고, 북알프스를 넘고, 혼슈 횡단 비행에도 성공했다. 88년에는 열기구 중량급 고도 세계기록 1만 2,910미터를 달성하기도 했다. 열기구로 에버레스트 넘기에 도전했고 97년에는 체공시간 세계기록을 달성했다.
책은 2008년, ‘젊은’ 이시카와 나오키가 그보다 더 나이든 간다 미치오를 만나는 것으로시작한다. 당시 쉰네 살의 간다는 ‘열기구로 태평양을 횡단’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파트너를 찾고 있었고 스물 여섯 살인 ‘젊은 친구’를 지인에게 소개 받는다. 동네 아저씨처럼 생긴 그는 당시 히말라야 8천 미터 봉 낭가파르바트를 열기구로 넘은 탐험계의 스타였지만 동네 아저씨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의외로 몸집이 작고 아주 평범한 사람이었어”
그 자신도 평범한 사람이었다. 일반 회사로 치면 과장이나 계장의 중간 쯤 되는 자리, 고향 마을 사무소의 학교급식센터 소장이었다. 작업복을 입은 공무원으로 살며 휴가를 백 퍼센트 활용해 원정을 다닌 그는 보기 드문 아마추어 모험가였다. 일반 기업의 지원도 별로 없었고, 열기구 원정으로 동료들의 눈치를 봐야했고, 심지어 가족들도 그의 그런 극성을 지지하지 않았다. 방에만 처박혀 매일 열기구를 연구하고 제작했다.
“부장이 되면 기구 원정은커녕 휴가를 쓰기도 힘들어. 나는 과장이나 부장이 되긴 글렀어.”
그가 만든 열기구는 관광용과는 다른 수제 열기구라 옥상의 물탱크로 사용되는 플라스틱을 경량화시켜 곤돌라로 삼아 구피(천막)를 달고 등산 용구를 이용해 연료 호스, 와이어, 로프를 설치하고, 버너로 구피 안의 공기를 덥히며 이륙하는 식이다. 열기구는 바람을 타고 어디든 흘러갈지 모르는 비행체라고 알려져 있지만, 그것을 원하는 방향으로 조종할 수 있다면 뛰어난 파일럿이다. 원하는 곳에 착륙시키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 집념의 사나이와 저자는 1차 태평양 원정을 시도한다. 혼슈의 해안에서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아, 구피 내부에 부착된 알루미늄 패널이 버너에 떨어져 불에 타는 것을 목격한다. 횡단을 위한 수많은 철야, 이륙을 위한 엄청난 긴장 상태, 상공에서 채 한 숨을 돌리기 전에 ‘이 원정이 정말 괜찮을까?’ 생각하지만, 말해봐야 소용없는 일은 다시 가슴에 담아둔다. 태평양 위를 날고 있었다. 고도를 높이기 위해 산소를 조절하고 불을 안정화시키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바다 위를 난다. 8천 미터에 도달한 열기구는 시속 150킬로미터 속도로 날고 있었고 이대로라면 북미대륙을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고도계의 수치와 시야, 감을 믿고 가는 일 그들은 모험을 하고 있었다.
까만 밤, 두 명의 모험가가 교대로 버너를 잡고 쉴 때 간다 미치오는 입을 연다. “구피의 아랫 부분에 구멍이 생겼으며, 잘 가야 태평양의 반밖에 갈 수 없다고.” 그는 젊은 친구에게 이 사실을 숨겼다고 말했다. 그대로라면 바다에 떨어지는 것이 자명했다. 그는 하강을 결심했지만, 자신의 꿈을 끊어야 한다는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본부에 연락을 취하고, 바다에 떠다니다가 구조대가 다음날 오길 바라며 고도를 낮췄다. 물탱크를 개조한 곤돌라는 비상시에는 배처럼 물 위에 떠있을 수 있었다.
그런데 고도를 낮추는 동안 눈보라가 발생했고, 이들은 아무 대비 없이 물 위에 떨어져버렸다. 해치를 닫지 못한 채 물이 들어왔고, 곤돌라가 바다 위에서 표류하는 동안 근처를 항해 중이던 컨테이너 선박이 요행이도 그들을 구해준다. 그렇게 ‘열기구’가 아닌 ‘선박’으로 LA에 도착한 그들은 각기 다른 꿈을 꾼다. 저자는 ‘단 하나 육감처럼 떠오른 이 세계와 자신과의 관계’ 에 대한 꿈틀거림을 느낀다.
“모험은 아무리 리스크를 줄인다고 해도, 최소한의 리스크까지 없앨 수는 없다. 그렇기에 모험인 것이다. 운도 실력도 필요하지만 실력만 있으면 거의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고, 나머지 몇 퍼센트를 운에 거는 모험이라면 나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실력보다 운을 시험하는 경우라면 그 원정은 너무 위험하다!”
간다는 집요했다. 당연히 2차 시도를 해야 했다. 될 때까지. 물탱크는 나가서 보지 않으면 불꽃의 상태를 확인할 수 없다며 곤돌라를 물탱크가 아닌 등나무 바스켓으로 바꾸기로 했다. 젊은 친구는 믿을 수 없다. 평범한 바스켓? 너무 위험했다. 간다는 안정성을 버리고 편리성을 택했지만, 등나무 바스켓은 바다에 착수하는 순간 물이 들어오고, 상공의 저온을 그냥 견뎌야 한다. 만에 하나 상공에 떠있지 못하는 순간, 죽음을 의미한다. 비상시 옮겨 탈 물탱크는 바스켓에 달고 비행을 하겠다고? 그게 말이 되는가?
“그다운 결단이었지만 내게는 왠지 자신을 몰아붙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간다는 한번 하겠다면 혼자서라도 실행한다. 리스크를 염두에 두지 않는 과감한 자세는 간다를 모험가로 만든 하나의 자질이기도 하다”
그렇게 그는 ‘혼자’ 언론사와 지인들의 배웅을 받으며 다시 미국을 향해 열기구를 띄운다.“신세 많이 졌습니다. 잘 다녀오겠습니다”는 간다가 남긴 마지막 말이다. 이후 그의 행적은 자동 비행 기록 장치가 주고 받은 본부와의 신호로만 기억할 뿐이다. 150킬로미터만 확보되면 60시간 안에 북미대륙에 진입할 수 있었다. 비행은 안정적이었고 기록을 세울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1차 비행 시간이 지날 즈음, 고도를 낮췄다.
2월 1일 (금)
3:00 고도 5,300미터
시속 136킬로미터

“비가 내리고 있다. 미국 영해에 들어왔다.
이제부터 상승해 날 수 있는 만큼 가겠다“
이것이 마지막 보고였다. 이 마지막 말은 많은 의문을 던지는데 무엇보다도 고도 5,300미터에서는 비가 내릴 수 없다는 점 때문이다. “이제부터 상승해 날 수 있는 만큼 가겠다”에는 비장한 결기가 배어 있었다. 모험가가 가장 강한 결의를 표명할 때는 궁지에 몰렸을 때다. 그는 승산이 없음을 알고 있던 것일까.
그 위치에서 연락 한 번 더 있었지만 연락이 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여전히 앞으로도 알 수 없다. 해안경비대가 조사했지만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의 제자이자 ‘모험 동료’였던 이시카와 나오키는 여기서부터 그의 행적을 재구성해본다. 아마도 빠르게 하강했고 모험가는 고도를 착각했으며, 구피에 눈이나 비가 쌓였으며, 등나무 바스켓에 물이 들어오자 물탱크에 옮겨 탈 수 없을 정도로, 긴급 구조 요청 장치를 켤 수도 없을 정도로 물에 빠르게 빠졌을 거라는 것이 그의 추리다. 물론 누구도 진실은 알지 못한다.
책은 후기로 넘어간다. 1차 횡단시 버려진 곤돌라가 어느 날 우연히 어느 섬에서 발견된다. 저자는 태평양을 떠내려가 일본 섬 어느 곳에 당도한 곤돌라를 보며 그의 ‘스승’을 생각한다. 단단히 들러붙은 조개와 소라는 곤돌라가 4년 반의 시간을 바다에서 항해했음을 보여주었다. 곤돌라는 떠내려온다. 바스켓과 달리. 곤돌라를 설계한 모험가의 판단은 역시 옳았다. 그의 고집이 다른 선택을 하게 만들기 전까지는.
“반드시 성공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그건 모험이 아니야. 하지만 성공한다는 확신이 없다면 출발하지 않아.”
저자는 말한다. 성공 여부를 단정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아직도 행방불명으로 남겨진 그의 마지막 원정을 담담하게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생사 고비를 함께 넘었던 그는 아직도 그가 이 세계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란다며 책을 마친다.
“그러니까, 열기구라는 게 있잖아요. 평범한 사람이 보면 꿈 같은 거죠. ‘와! 대단하다!’라고 말하는.. 하지만 제겐 꿈이 아니에요. 현실이죠. 남겨졌으니까요. 남편은 이게 안 되면 어쩌지 하고 신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늘 어떻게든 된다, 다 괜찮다죠.”
열기구에서 내린 듯한 기분을 느끼며, 식은 땀을 닦으며 왜 나는 이 서평을 쓰고 있을까 다시 생각해본다. 휙휙 넘어가는 이 200쪽이 조금 넘는 책. 국내에서는 누가 살까 싶은 책. 중고책방에 가져가도 1,000원 밖에 매겨지지 않아 다시 책장에 꽂아 넣어야 할 책. 누군가에게 선물하고 싶은 책인가? 이 전율을 상대에게 전할 수 있을까? 나는 모험을 떠나고 싶은가? 아니, 이미 모험가 같이 살고 있을까? 누구나 인생에 한두 번쯤은 미친 선택을 한다. 그것이 미친 선택임을 알면서 말이다. 그대의 미친 선택이 나의 미친 선택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왜 우리는 누군가의 삶에서 나를 반추할 수밖에 없는가. 모두의 ‘미친 선택’이라는 선택을, 나는 선택한다. 열기구가 떠오르는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때 또 다른 서평으로 이 선택의 결과를 말하고 싶다. 지금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다. 우리의 삶은 이 모험으로 이루어져있으므로. 누군가의 모험에 내 모험을 덧대는 것이 삶이 아니었던가.

미스김

블로그를 운영한 흑역사가 있는 미혼의 직장인. 현재 글밥을 먹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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