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판 서평 지면 두 개’를 처음 기획할 때 기자는 필진들의 부담을 덜기 위해서라도 가끔씩 스스로도 서평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필진들이 대체로 마감을 잘 지켰고, 기자는 바빴으며, 다소의 게으름까지 겹쳐 2013년 7월부터 72건의 서평이 쌓이는 8개월의 시간 동안 스스로 서평을 쓰는 일이 없었다.

오늘의 서평 역시 ‘지면이 빵구나서’ 쓰는 것이 아니다. 기자가 직접 평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책이기 때문에 쓰는 것이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기자는 윤여준 새정치추진위 공동위원장과 제법 인연이 있다. 이 책은 ‘메디치미디어’ 출판사가 직접 책을 내기 위해 기획한 윤여준의 열 개의 강연 및 질의응답 내용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데, 그 열 번의 강의의 사회자가 바로 기자였다. 강연이 실행되는 중 기자는 <팟캐스트 윤여준>의 공동진행자가 되기도 했기 때문에 어느 시기엔 일주일에 두 번씩 그를 만나는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 책, 윤여준의 진심
이 책의 표지에 안철수 새정치연합 중앙운영위원장의 발언이 들어가 있는 것은 우연이다. 강연이 기획되고 진행될 당시(이 강연은 대선이 끝난지 몇 개월이 지나지 않은 2013년 2월에서 4월까지 진행되었다) 윤여준은 언론에게 ‘안철수에게 홀대받고 밀려나 그를 감정적으로 매우 싫어하는 이'로 비춰지고 있었다. 실제로 만나본 기자는 윤여준이 그런 상태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가 향후 안철수와 무엇을 함께 할 거라고 예측하기는 어려웠다. 단언컨대 ‘메디치미디어’도, 기자도, 윤여준 본인도 몰랐다. 물론 2014년이 왔을 때 안철수와 윤여준이 접촉하고 있었고, 윤여준이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사실마저 몰랐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시기와 이 시기 사이에 간격이 있었을 뿐이다.
잠깐 ‘메디치미디어’의 ‘사장님’의 입장에서 이 책의 기획의도를 추측해보겠다. 그분에게 확인받은 ‘진심’은 아니고 전적으로 기자의 추측이다. ‘메디치미디어’는 윤여준이 콘텐츠가 있다고 믿었고, 책 출간을 제의했다. 이럴 경우 저자는 대체로 먼저 자기가 평소 쓰고 싶어 하던 것을 쓰겠다고 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나온 책이 <대통령의 자격>(윤여준 저, 메디치미디어, 2011)이다. 그런데 이 책은 재미있는 책은 아니다. 윤여준 본인이 학술서만큼은 아니지만 교양도서 수준이 되는 ‘통치술’(Statecraft)에 관한 총론 격 논의를 하는 책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종종 이렇게 ‘사장님’들이 난감해할 욕심을 부린다.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공을 던져 볼 판정을 받는다.
<대통령의 자격>은 분명히 미덕이 있는 책이나, 분명하게도 재미는 없는 책이다. 이런 책을 한 출판사에서 내고 나면, 여전히 저자의 콘텐츠를 신뢰하는 ‘사장님’은 틀림없이 이렇게 말하게 된다. “장관님, 한 권 쓰시고 싶어 하는 걸로 쓰셨으니, 이번에는 저희가 하자는 대로 한 번 하시죠?” 이런 말을 들으면 마음이 약한 저자들은 당연히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 책, 대통령의 자격
그렇게 해서 ‘사장님’이 강연계획을 잡고 강연을 진행한다. 녹취를 풀 사람을 구하고 녹취 내용을 감수할 사람을 구한다. 강연은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원고는 강연이 끝난 후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 때 확보된다. 다만 내용이 방대하기 때문에 이 중 어떤 측면에 ‘야마’를 맞춰 단행본을 만들어낼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시간이 지난다. 출판사는 다른 책에 집중하다 보면 종종 들어온 원고도 잊는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다 보니, 어라, 저 사람이 안철수에게 가버렸네?!?! 새누리당 지지자나 민주당 지지자들이 이 책을 싫어할 만한 상황이 되어 버렸네? 그러면 안철수 지지자라도 잡아야지!! 이게 이 책의 표지에 안철수의 발언이 들어간 ‘사연’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출판사에게 확인받은 바는 없다. 단지 스스로 저자이기도 한 기자의 추측일 뿐이다.
하지만 이 책의 가치는 현재 윤여준이 안철수를 돕고 있다는 일 따위와는 무관하다. 그걸 아는 이가 아마도 기자 하나 정도일 것이기에, 이 서평을 직접 쓰게 되었다. 이 책의 가치를 간단하게 설명하고 이 서평을 마치겠다. 기자의 의견에 타당성이 있는지 확인하려면 직접 이 책을 읽으면 된다. 특히 1부의 내용이 중요하다.
‘윤여준의 개인사’는 흥미롭게도 대한민국 보수의 역사와 온전히 포개진다. 그것은 그의 부친 고 윤석오 선생도 이승만의 경무대에서 일했기 때문이다. 윤여준의 유년시절 기억에는 경무대가 있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에게 귀여움을 받던 그 아이는 4.19 시위에 참여하게 된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한 후엔 당시엔 대표적인 ‘야당신문’이었던 <동아일보> 기자가 된다. 그후 <경향신문>으로 넘어간다. 야당 출입하는 정치부 기자의 기억이 60년대에 있다. 유신 이후, ‘정치부 기자’의 가치가 땅에 떨어지자 그는 ‘기자 선배’를 따라 공직에 입문한다. 1979년에서 1983년까지 그는 싱가포르 영사관에 있었다. 그리고 한국에 복귀했을 때, ‘전두환 정권의 청와대’로 오게 된다. 노태우 정권 때도 그는 청와대에 있었고, 김영삼 정권 때엔 환경부장관을 했다. 정권이 바뀐 뒤엔 한나라당에서 이회창 등을 돕게 된다. 정치인으로서 그의 마지막 ‘작품’은 2004년 총선의 한나라당의 의외의 선전이다. 그후 그는 자연인이 되었다가, 법륜스님에 이끌려 시민사회 영역으로 나오게 된다.
‘윤여준의 경험’은 민주화 운동세력이나 그 지지자들이 결코 긍정할 수 없는 그것이다. 기자 역시 그의 경험담을 들으면서, 그가 그때에 그런 활동을 하지 않았다면 한국 사회에 더 나은 결과가 오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옴이 들었다. 특히 2000년 총선과 2004년 총선 상황이 그러했다. 2002년 대선 때엔 다행스럽게도 이회창이 그를 멀리했다. 대체로 보수파 정치인들은 급할 땐 직언할 수 있는 그를 찾았다가 형편이 나아지면 그를 멀리했다. 그가 ‘전략가’라 불리면서도 대체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조직을 맡아 선전하여 근소한 패배를 당하는 장수’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이유다.
윤여준을 취재하기 시작했을 때, 기자의 어떤 주변 사람들은 ‘좀 더 세게 들이받아야 하는 거 아니냐’, ‘너무 얌전하게 물어본다’라는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기자는 잘 그러지 못하는 성격이고, 이것은 기자로서는 단점일 것이다.
하지만 윤여준의 주변에 그랬던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름을 언급할 수는 없지만, 윤여준의 주변에는 깜짝 놀랄 정도로 다양한 스펙트럼의 사람들이 몰려있다. 명백한 독재정권의 폭압의 피해자가 그와 오랜 교류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한 활동가는 십여 년 전 윤여준을 만났을 때 “장관님은 부역자이십니다...”라고 말했다고 했다. 그 말을 윤여준이 선선하게 긍정하여 그와 교류할 수 있었다고 했다.
윤여준은 보수주의자이지만, ‘한국 보수’와 궁합이 잘 맞지는 않았다. 그러니 내면에 갈등이 없을 수 없었다. 하지만 결국 스스로 떨치고 나오지는 못했다. 그는 두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처자식을 핑계로 신념을 지키지 못했다. 하지만 독립운동하거나 민주화운동한 사람들이 처자식이 없어서 그런 일을 했던 것은 아니다. 그 사람들 중에서도 처자식이 있는 사람이 많았다. 너희들은 나와 같은 상황이 왔을 때, 신념을 지키는 쪽으로 선택을 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만일 그렇게 살지 못할 거라면, 그렇게 사는 이들에 대한 ‘리스펙트’는 가져야 한다.
윤여준의 이와 같은 태도는 ‘최소한’의 인간적 예의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최소한’을 가진 이가 ‘한국 보수’에 거의 존재하지 않기에, 그의 태도는 ‘한국 보수’의 예의의 ‘최대치’라고 여겨질 정도다.
독자들이 기자의 판단에 동의할 필요는 없다. ‘윤여준의 도덕성’이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는, 이 땅의 야권세력이 대체로 7~80년대부터 ‘제도권’에서 벗어난 ‘운동권’ 출신이기 때문이며, 그 점이 너무 고착화되어 이 땅의 ‘통치담론’과 ‘피치담론’이 너무 멀리 있고, 그 덕에 간신히 승리하고 십 년이나 집권할 때에도 책 잡힐 일을 했고 지금은 마치 수권능력이 없는 이들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관료’ 출신을 쓰면 보수적인데, ‘관료’ 출신이 아닌 이를 쓰면 관료들을 몰라 관료에게 당하는 딜레마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독재정권은 정당성이 없었다.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내란’ 세력이었다. 하지만 그 시기에도 국가기구를 통해 발현된 공공성이 전무했던 것은 아니다. 권력을 사유화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국민적 저항에 부딪혀 권력을 뺏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어떠한 공적인 일을 했다. 경제성장이 이루어졌고 과실이 제대로 분배되지는 못했지만 가끔은 개혁을 하기도 했다.
아마도 윤여준 뿐 아니라 꽤 많은 사람들이 그 시절에도 정권의 부조리한 부분에는 눈을 감고, 자기 영역에서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공적인 가치를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것으로 자기 정당화를 했을 것이다. 기자는 그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어찌 어찌 평가해야 한다는 제안을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운동권들이 흔히 ‘민중’이라 부르는 그 사람들이, 민주화운동에 전적으로 헌신한 사람들보다 이런 사람들에게 더 감정이입을 하는 것은 사실이다. 운동가보다는 관료나 경제인이 자신들의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 줬고 그것을 잘 안다고 느끼곤 한다.
왜냐하면 생활인들 역시 대체로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운동권들에겐 ‘80년 5월’과 ‘87년 6월’ 사이가 한 호흡이었고 7년 전 함께 봉기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이제야 일어선 것이 안타깝고 한스러웠겠지만, 그 7년 사이에도 사람들은 하루하루 먹고 일하고 살아가야 했다. 이 사람들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면 정권교체는 없다. ‘리스펙트’를 받아 마땅한 헌신적인 삶을 산 이들은, 그들끼리만 모여서 대화를 하다 보니 종종 이런 평범하고도 단순한 사실을 잊곤 한다.
주변 사람들이 기자에게 불만을 토론했을 때, 기자는 다음과 같이 답하곤 했다. 부도덕한 집단 속에서 부도덕한 일에 대해 협력하는 것을 거부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러면서도 가장 윤리적이 될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의 행위를 잊지 않고 기록하여 후세에 남겨주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현재 여권과 야권의 수권능력은 비대칭이다. 이 비대칭을 타개하려면, 정권을 운용해본 이들의 경험을 적극적으로 흡수해야 한다.
그런 견지에서 본다면, 윤여준과 같은 노인이 독재정부에서 일했던 자신의 경험을 들려주는 것은 젊은 세대에겐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저항자의 관점에서 서술한 역사도 소중하지만, 당시 통치자는 어떻게 생각하고 그런 일들을 했던가를 이해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그래야 야권이 정권을 잡았을 때 우선순위를 어떻게 잡고 어떤 식으로 ‘개혁’을 할 것인지도 계획할 수 있다. 시민들이 민주화 운동가를 진심으로 존경하는 세상이 오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이 ‘기울어진 운동장’을 ‘평탄화’시키기 위해 일단 ‘기울어진 운동장’ 속에서 승리해야 하는 것이다. ‘윤여준의 경험’은 이를 위해서라도 ‘윤여준의 진심’보다 더 중요하다(참고로, 윤여준은 이 책 제목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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