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야심차게 내놓은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을 발표하는 과정에서 기획재정부가 애초 제출한 원안이 수정된 채 발표되면서 언론계 관계자들은 잠시 혼란에 빠졌다. 마감 1시간을 앞두고 기사를 수정하는 사례가 있었는가 하면 일부 인터넷 및 지역언론 등은 의도치않은 ‘오보’를 내기도 했다. 일부 지역언론의 경우 인터넷판에서도 변경된 내용을 바로잡지 않아 아직 ‘오보’가 그대로 방치돼있는 상황이다.

▲ LTV, DTI규제의 완화 가능성을 시사한 중앙일보의 26일자 기사.

일부 주요 언론의 경우 애초 청와대가 발표하기로 했던 내용의 비중이 축소되는 바람에 억지로 기사를 배치하는 상황도 벌어졌다. <중앙일보>는 26일자 지면에서 ‘주택시장 마지막 규제 LTV·DTI 손질한다’는 제하의 기사를 주요하게 배치했다. 하지만 기사에 드러난 관계자들의 발언을 종합해보면 LTV와 DTI 규제에 대한 정부의 입장은 사실상 결정된 것이 없고 오히려 ‘애매한 것’에 가깝게 느껴진다.

이런 상황은 기획재정부가 지난 19일 경제혁신 3개년 계획에 대한 사전브리핑을 실시한 내용과 25일 청와대의 발표 내용에 차이가 생기면서 비롯됐다. ‘LTV·DTI 규제 합리적 개선 방안 마련’의 경우 애초 19일 사전브리핑 때만 해도 박근혜 대통령의 담화문에 포함될 것으로 예상됐지만 정작 25일 발표에는 빠졌다. 이 문구는 담화문과 함께 배포된 ‘참고자료’에 삽입되어 있는데 부연설명도 없이 단 한 줄만 적혀있다.

▲ 박근혜 대통령의 경제혁신 3개년 계획 담화 관련 기획재정부가 배포한 '참고자료'의 일부 내용. LTV, DTI 규제 조정과 관련해서는 단 한 줄(우측 상단 붉은색 밑줄 표시)만 적혀있다. (기획재정부)

애초 박근혜 대통령의 담화 발표 이후 현오석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각 부처 장관들과 함께 합동브리핑을 실시하기로 예정돼있었으나 당일 취소된 것도 상황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이를 두고 <조선일보>는 ‘들러리 된 기재부’라고 표현했고 <중앙일보>는 ‘현오석 신임 잃었나’라고 표현했다. 이들의 기사에서 두 달간 관계부처의 입장을 조율해 내놓은 초안이 청와대의 칼질 한 번으로 반쪽이 된 데에 대한 기획재정부 관료들의 비분강개가 그대로 드러난다. 특히 <중앙일보>는 대통령의 담화 낭독 과정에서 현오석 부총리가 눈을 떴다 감았다 반복했다는 이유 등을 들어 ‘신뢰를 잃었다’는 해석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 청와대와 기획재정부 간의 혼란을 두고 현오석 부총리가 신임을 잃은 것 아니냐는 추측을 보도한 중앙일보의 26일자 기사.

<연합인포맥스>는 ‘경제혁신 3개년 오보 쏟아진 사연은’이라는 제하의 기사를 통해 이와 같은 혼란상을 진단했다. 이 기사에는 담화문 발표 이후 사전 브리핑에서 다뤄진 대책이 이후 후속조치에 포함되는지 아니면 중도폐기되는지 등을 놓고 또 다른 혼란이 예상된다는 설명도 포함돼있다. 전체 경제정책의 컨트롤타워로서 기획재정부의 위상이 추락했기 때문에 ‘며느리도 모른다’는 식상한 문장만이 이러한 우문의 현답으로 적절할 것이다.

정부는 이 같은 혼란에 대해 나름대로 해명을 내놓았지만 충분한 설명이 되지 않고 있다. 김철주 기획재정부 경제정책국장은 담화문 발표 직후 화상으로 긴급브리핑을 진행해 “100개 항목이 너무 복잡하고 백화점식 나열에 그친다는 언론 등의 지적이 있어 청와대, 다른 부처 등과 협의하는 과정에서 빠지게 됐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으로는 19일 사전브리핑에서 추경호 기획재정부 1차관이 청와대와 조율이 끝났음을 강조했고 내용의 조율 과정에서 경제정책의 컨트롤타워인 기획재정부가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의문은 해소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와 관련해 정부 내 이견이 제대로 조율되지 않고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다. 19일 사전브리핑 자료와 25일 박근혜 대통령 담화를 비교해 빠진 내용들을 분석해보면 이런 추측에 상당한 근거가 있다는 점을 눈치챌 수 있다. 예를 들면 LTV·DTI 규제 완화의 경우 금융위원회, 국토교통부 등이 금융기관 건전성 문제 등과 연관해 반대 입장을 표명하고 있는 사안이다. 금융소비자보호원 설립의 경우 금융위원회 조직 분리 및 금융감독원 체제 개편 등과 연계돼 이해관계가 첨예한 사안이다. 코스닥 시장 분리 계획 역시 한국거래소의 공공기관 해제 문제 등과 연계돼 금융위원회가 난색을 표하고 있는 사안이다.

일부 사안의 경우 불과 3개월 앞으로 다가온 지방선거를 고려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가능한 것도 있다. 대표적으로는 종교인 과세 문제가 있다. 애초 기획재정부가 야심차게 진행한 이 사안은 19일 브리핑 자료에는 과세형평성 제고 항목의 일부로 포함돼있었으나 25일 발표에서는 제외됐다. 종교인 과세 방안의 경우 선거에 영향을 끼치는 종교계의 반발이 심각해 정치권에서 부담스러워하는 사안이다. 보조금 부정수급 비율 축소 등의 사안도 보조사업의 수혜를 입은 단체나 기관 등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어 선거를 앞두고 단행하기에 무리가 있다고 볼 여지가 있다.

▲ 현오석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26일 오전 서울 종로구 국세청 본청에서 열린 전국세무관서장회의에서 치사를 하고 있다. 현 부총리는 "소득 있는 곳에 세금이 있다"면서 "종교인 소득과 파생상품, 금융용역에 대한 과세 사각지대를 해소하겠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애초 발표될 예정이었다가 제외된 정책들을 일관된 잣대로 평가할 수 없기 때문에 청와대의 의도를 한 마디로 정리해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 취임 1주년에 대한 비판 중에 ‘소통의 부재’가 다수를 차지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는 있다. 정부 부처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청와대와 정부 부처 간의 상시적인 소통이 필수적이다. 이번 사태가 취임 1년이 지나도록 이러한 체계가 구축되지 못한 것에서 나온 잡음이라면 향후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취임시 공표됐던 책임총리제 또는 책임장관제 강화 등의 특단의 대책을 세울 필요가 있다.

박근혜 대통령에 호의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경제 관료들의 신자유주의적 공세에 대통령이 브레이크를 건 것이라는 해석을 '굳이' 해볼 수도 있다. 일각에서는 대통령이 겉만 번지르르한 관료들의 보고서에 분노했으며 자신이 직접 사회안전망 확충 등의 정책을 덧붙인 것 아니겠냐는 추측 또한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이런 경우라면 이번 사태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결단(?)에 긍정적인 평가를 내려줄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그런 의도였다면 기획재정부라는 정부 내 가장 권위있는 부처를 이렇게 망신줄 것이 아니라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금융위원회 위원장, 청와대 경제수석 등을 보다 서민친화적인 인물로 교체할 것을 검토하는 것이 훨씬 바람직하지 않는가 하는 고언을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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