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오후 3시 서울 중구 명동성당 앞. 박근혜 정권 출범 1년을 맞아 언론인들이 거리로 나섰다. 언론인들은 입 주변에 검은색 X자 표시가 명확하게 그려진 가면을 쓴 채 시민들 앞에 섰다. 말을 하고 싶어도 말을 할 수 없는 언론인들의 부끄러운 자화상을 담은 가면이었다.

박근혜 정권이 출범한 지 오늘(25일)로 딱 1년이 되었지만, 언론 환경은 변한 게 없다. 낙하산 사장 방지,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 해직언론인 복직 등 언론인들이 한 목소리로 줄곧 요구하던 최소 조건 가운데 그 어느 것도 해결된 게 없다. 공영방송 MBC에는 여전히 ‘낙하산’ 논란에서 자유롭지 않은 이가 사장으로 선임됐고, 해직 언론인들은 길 터를 잃고 아직도 거리에서 방황하고 있다.

아무 것도 바뀌지 않은 언론 환경을 규탄하기 위해 언론인들이 기자회견을 자처했다. 전국언론노동조합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다”며 △박근혜 정권의 언론장악 의도에 맞서 단호한 투쟁을 전개하며 △박근혜 정권의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 공약 파기를 강력 규탄하고 △해직 언론인 복직을 기필코 쟁취한다고 결의했다.

▲ 전국언론노동조합이 25일 오후 3시 서울 중구 명동성당 앞 거리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미디어스)
마이크를 잡은 강성남 전국언론노동조합 위원장도 “오늘을 기점으로 새로운 투쟁을 시작해 언론장악 세력을 끝까지 몰아내고 공정언론을 쟁취 하겠다”며 투쟁 의지를 밝혔다.

권오훈 언론노조 KBS본부 본부장 또한 “KBS본부는 오늘 오후 1시30분부터 전국 조합원 총회를 열어 결의문을 채택했다”며 “다시 공정방송을 위한 싸움을 시작하겠다. 미흡하더라도 최선을 다하겠다. 공정방송의 깃발을 내려놓지 않고 싸우겠다”고 거듭 공정방송 의지를 강조했다.

이성주 언론노조 MBC본부 본부장은 과거 1987년 바로 이 자리에서 MBC 취재진이 시민들로부터 뭇매를 맞았던 사실을 말하며, 지금의 상황을 개탄했다.

“1987년 바로 이 자리에서 MBC 취재기자들이 시민들에게 돌을 맞고, 취재 차량이 파손되었다. 독재가 있는데도 보도하지 않고 날씨를 보도하고 시보가 울리면 대통령을 보도했기 때문이었다. 언론인들이 이렇게 살 수 없다며 일어선 게 그게 MBC 노조의 탄생 정신이다. 수많은 세월이 흘러 똑같은 상황이 MBC 취재진에게 재현되고 있다.”

100여명의 언론인들이 선 명동성당 앞 거리는, 현재의 언론 상황을 반영하듯 어수선했다. 공사장 주변의 먼지, 레미콘을 실어 나르는 거대한 공사 차량, 지나가는 시민들의 움직임까지 뒤엉켜 혼란스럽기까지 했다.

30여분 동안 이어진 기자회견 내내 언론인들은 “투쟁”과 “공정보도”를 외쳤지만, 언론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시민은 많지 않았다. 대부분 시민들이 무심한 듯 힐끔 보고 지나갈 뿐이었다. 지난 1년 간 언론, 그리고 언론인들이 어떤 수모를 겪었는지 상세한 내용을 담은 대자보가 명동 곳곳에서 뿌려졌지만, 큰 주목을 끌진 못했다. 되레 길을 막아 이동에 방해된다며 짜증을 내는 시민과 “박근혜는 잘 하고 있다”며 기자회견 내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한 어르신이 있을 뿐이었다.

엄혹한 독재 정권이었던 1987년으로부터 무려 27년이 지났다. 시간이 흘렀어도 상황은 같다. 언론을 장악하려는 노골적인 의도를 감추지 않는 정권이 있고, 뉴스 시작과 동시에 주어를 ‘박근혜 대통령’에 맞춘 채 대통령의 동정 보도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방송 또한 여전하다.

어쩌면 “공정보도”라는 이름의 시험대에 오른 것은 비단 박근혜 정권만이 아닐 수도 있다. 언론인들 스스로 진정 언론 자유 실천 의지가 있는지, 진정 공정보도 의지가 있는지 가늠할 수 있는 시험대에 선 것은 분명하다. 말을 하고 싶어도 말을 할 수 없는 언론 환경 가운데서 이의를 제기하기 보단 주어진 상황에 순응해 나간 다수의 언론인들 덕분에 언론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은 매서워졌다. 불과 몇 년 전, ‘MB정권’이라는 엄혹한 현실 속에서도 밤마다 촛불을 들고 MBC와 YTN, 때로는 KBS 직접 찾아 투쟁에 나선 언론인들을 격려했던 수많은 시민들은 지금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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