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장님도 좋아하실거야”라면서 기대감에 찬 얼굴로 중년의 기자가 에디터 접견실로 들어간다. 하지만 본인의 바람과는 달리 그는 미리 준비한 수십 장의 기획안과 함께 장렬히 내팽개쳐진다. 이윽고 “낮술 먹고 그냥 한 번 뒤집든지 내가 그래야 되겠어!”라고 호기롭게 회사를 나서 근처 술집에 가서는 “아니 이렇게 좋은 기획안이… 이해를 못하겠어! 전부 썩은 동태눈깔이야”라고 외친다.

‘예능의 신’이 되고 싶다며 기획안을 만들어 내고, 동료들의 시큰둥한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홍대를 누비는 이 사람은 누구일까. 올해로 <경향신문> 입사 19년차를 맞는 김문석 기자다. <경향신문> 팟캐스트 <연예는 박하수다>를 진행하면서 예능 등 TV 프로그램에 관심이 생겼다는 김문석 기자는, 동영상 업로드가 가능한 홈페이지 플랫폼이 마련돼 있으니 잘만 하면 ‘재미있는 동영상’을 직접 만들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 전 농담처럼 던진 그 말은, 한승곤 PD가 기획에 참여하며 살이 붙었고 결국 10분짜리 동영상으로 탄생했다. 김문석 기자의 예능 도전기 <예능의 신 되고 싶다>(이하 <예능의 신>) 1편은 12일 유튜브(동영상 링크)를 통해 공개된 바 있다. <미디어스>는 21일 <경향신문> 사옥 부근에서 김문석 기자를 만나 ‘좌충우돌 예능 제작기’를 들어보았다.

오로지 ‘재미’로 시작
“방송국 이름을 MBS라고 지은 거 보면 알지 않나”

<예능의 신> 영상을 보면, 김문석 기자가 만들려고 하는 프로그램의 ‘컨셉’을 알 수 있다. 젊음을 느껴보기 위해 젊음의 거리인 홍대 클럽에 가 보겠다는 것!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던진 이야기에 ‘재밌겠네요, 해 보는 건 어떨까요’ 하고 구체화시킨 사람이 있다. <예능의 신> 영상을 촬영한 한승곤 PD다. 한승곤 PD는 이날 김문석 기자의 인터뷰에 함께 했다.

▲ 경향신문 입사 19년차인 김문석 기자. "사진 한 장만 찍을게요"라는 부탁에 이런 포즈를 취해 주었다. (미디어스)

“박은경 기자, 하경헌 기자랑 <연예는 박하수다>라는 팟캐스트를 하고 있는데 원래 드라마, 연예 쪽에 전혀 관심이 없다가 이걸 하면서 관심이 생겼다. 사진부에서 디지털영상팀에 오면서 관련 작업도 하게 되고… 방송을 자꾸 하다 보니 예능이 진짜 재밌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설 전에 장난으로 생각을 해 봤다. <경향신문> 안에 방송국을 하나 만들어봐야겠다고. 이름은 MBS(문석 Broadcasting System).

그러다 서로 계속 이야기를 하다 보니 대충 그림이 나왔다. 처음에는 10분 분량으로 만들려고 했다. 홍대 가서 난리를 피우면 예능스러운, 재밌는 동영상을 하나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말도 안 되는 시작이었지만 후배들과 이야기하며 계속 아이디어를 보태면서, 설 끝났을 때쯤 전체적인 기획 아이디어가 나왔다”

김문석 기자는 서류와 함께 바닥에 던져지고, 넘어지고, 낮술도 먹고 상사 욕을 하고 홍대에 가서는 영문을 모르는 시민들을 붙잡고 다짜고짜 <예능의 신>을 응원해달라고 한다. 나름의 열연(?)을 펼쳤는데, 혹시 연기하는 게 걱정되지 않았냐고 묻자 “그런 건 없었다”고 시원하게 답했다.

“(영상 제작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야말로 재미로 했다. 처음에 이걸 구상했을 때 방송국 이름을 MBS라고 지은 거 보면 알지 않나. 시작을, 얼마나 재미로 했는지 알 수 있다. 두려움이나 그런 건 없었다. 우리끼리 한 거고, 본격적으로 ‘작품을 만들어보자!’ 해서 만든 게 아니라 카메라 앞에서 부자연스럽지 않았다. 장난 비슷하게 만들었지만 찍다 보니 나중에는 진지하게 하게 되긴 했다”

점심, 퇴근시간 쪼개 촬영
“작가 없어서 대사도 즉흥적으로 쳐”

재미로 시작한 일이지만, 10분짜리 영상을 만드는 건 결코 쉽지 않았다. 당연히 영상 제작 경험이 없는 김문석 기자는 그걸 알 리 없었다. 무작정 홍대에 가서 좀 ‘난리쳐 보면’ 영상 하나는 뚝딱 나오지 않을까 했던 예상은 가볍게 빗나갔다. 다행히 한승곤 PD가 <예능의 신> 제작 선언에 대한 주변 기자들의 반응, 국장실에서 쫓겨나는 장면, 술을 마시고 주정부리는 장면 등등 아이디어를 내 완성될 수 있었다.

▲ 2월 12일 유튜브를 통해 공개된 예능의 신 되고 싶다 1편

실내 장면은 모두 퇴근시간 이후에 찍었다. 홍대 장면도 퇴근 후 찍었다. 일부 모자라는 장면은 점심시간에 한다든지 해서 최대한 ‘업무에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찍었다. 덕분에 김문석 기자는 시간을 쪼개고 쪼개야 했다. 묵묵히 영상을 촬영했던 한승곤 PD도 고생했다는 말을 덧붙였다. “얘도 굉장히 바빴다”

<예능의 신>에는 ‘처음처럼’, ‘참이슬’ 같은 상표명과 ‘이 똥돼지 같은 놈아’, ‘아저씨 또라이 같아요’ 등의 비속어가 나온다. 혹시나 영상을 만들면서 신경 쓰이진 않았을까. 더구나 요즘처럼 ‘칼 같은’ 심의가 진행되는 판에.

“우리는 인터넷에 올리는 거라 (심의라든지) 장애를 받지 않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넣었다. 욕설 부분을 뺄까 말까 하다가, 어차피 이 얘기가 설정된 얘기고 보는 누구나 설정된 상황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상관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시간도 없었지만 전체적인 제작 환경도 열악하긴 마찬가지였다. 제작비는 영상 후반부에 나오는 19,900원이 전부. 처음에는 100만원도 넘게 들었다고 얘기해 기자가 재차 “진짜요?”라고 물었는데, 이내 “에이~ 당연히 아니지”라고 김문석 기자는 익살스럽게 답했다. 사실 19,900원은 촬영하면서 허기질 때 근처 빵집에서 빵, 커피를 사먹은 돈이었다. 일부는 편집하면서 시켜먹은 삼선 짜장면 값으로도 나갔다.

▲ '예능의 신 되고 싶다'에서 거의 대부분의 실무를 맡은 한승곤 PD. 처음에는 어색해하다가 2번 만에 자연스러운 포즈를 알아서 취해 주었다. (미디어스)

따로 작가가 없어서 구성이나 상황의 대사도 알아서 쳐야 했다. 한승곤 PD는 그런 아마추어 같은 느낌이 장점이라고 보았다. ‘작정하고 웃기려고 한 게 아닌 자연스러움’이 <예능의 신>의 매력이라는 것. 김문석 기자는 이 대목에서 “이런 컨셉은 처음”이라며 “언론계 핵폭풍이라고 해 주세요”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억지웃음은 안 되는 것 같다. 작정하고 웃기려고 하면 머리로 생각하게 되니까. 밑도 끝도 없이 시작했기 때문에 의외성에서 오는 포인트가 있지 않았나 싶다. 또, ‘저렇게 해서 어떻게 국장이 됐어?’ 이렇게 직장 상사를 디스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은근히 그런 쪽에 공감한다는 반응도 많았다. 머리를 많이 굴리지 않았다. 고민하고 자르지 않고, 나온 장면을 다 영상에 올렸다”

의도한 ‘어설픔’도 있다. <예능의 신> 영상에는 김문석 기자의 아이디어가 동료 기자들에게 외면, 홀대받는 장면이 있는데 이때 ‘우리도 이해 못하겠어’, ‘웃기지 마세요’, ‘저도 슬퍼요’ 등 제작자 입장에서 쓰인 자막이 나온다. 한승곤 PD는 “자막 내용은 웃기려고 한 게 아니라 진짜 진심이었다”며 “90년대 인터넷 영상 스타일처럼 하려고 했다. 영상은 이렇게 찍어도 편집을 잘하면 볼 만하게 만들 수 있는데… 일단 이게 주 업무가 아니어서 할 시간이 없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자체 VIP 시사회에서 열렬한 박수 받아… 재능기부로 ‘로고’까지 탄생
“내가 어떤 걸 했다는 느낌! 스스로 업(UP)된 기분이다”

김문석 기자의 파일럿 영상 제작기는 <경향신문> 인터넷뉴스로도 나갔다. “되게 지루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는 재밌네요 ㅋㅋㅋㅋㅋ물론 홍대편은 보지 않았습니다. 손발이 오그라들어서”,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하시나보네요. ㅎㅎ 파이팅!!!” 등의 댓글도 달렸다. 주변 기자들의 반응도 이렇게 호의적이었을까?

김문석 기자는 “내부 VIP 시사회까지 했다”며 자랑했다. 이날 VIP 시사회에는 몇몇 국장들과 인터넷뉴스팀 소속 직원들이 참석했고, 회의실의 대형TV를 통해 <예능의 신>이 첫 ‘방송’됐다. 한승곤 PD도 “떠나갈 것 같았다”고 당시 반응을 전하며 “다음 번에는 청계천에서 레드카펫 가져와서 깔아야 하지 않나 하고 생각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우리 회사 사람들이라 더 어필했던 것 같다. 아는 사람이 나오면 더 재밌으니까. 내부 시사회 때 10명 정도가 같이 봤는데 환호성 지르고 박수 치고 그러니까 (밖에 있던) 편집국 사람들도 듣고 있다가 ‘왜 저러나’ 이러면서 궁금해 했다. 회사 반응도 좋았다. 엄청나게 웃긴 것도, 웰메이드도 아니지만 신문사 내에서 ‘아무도 안한 걸 했다는 것’에 대해서 반응이 좋았다. 디지털뉴스편집국 김종훈 국장님이 10분 정도로 만들라고 해서 이걸 뭐 계속해서 만들어 보라고 했다”

물론 비판도 많았다. 연기가 어색하다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그래도 김문석 기자는 개의치 않는 듯했다. 낚시채널 FTV에 방문했을 때, 거기 있는 사람들이 영상을 미리 돌려보고 김문석 기자를 알아본 에피소드나, FTV 전문PD가 “너무 잘 만든 영상”이라고 칭찬해 준 이야기, “예능의 신 보다가 빵빵 터졌어요. 소주 병나발 장면에서 나온 애드리브도 인상적이에요 ㅋ 정말 재미있네요 파이팅입니다^^”라는 장문의 문자 전달까지 ‘긍정적 피드백’은 깨알 같이 다 소개했다.

▲ 디자인팀 재능기부로 탄생한 예능의 신 로고 (사진=김문석 기자 제공)

그나저나 이 프로, 계속될 순 있을까. 젊음을 느끼기 위해 중년 기자가 홍대로 향한다는 내용은 딱 1회로 끝날 내용인데, 장난처럼 시작한 <예능의 신>이 계속될 수 있을지 궁금했다.

“2월 안으로 만들려고 했는데 아직 모르겠다. 기획만 되면 된다. 촬영은 의외로 쉽고 편집이 오래 걸린다. 마감시간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3월 초까지는 만들지 않을까. <예능의 신 되고 싶다>는 큰 타이틀 갖고 사람들 만나서 개인기를 끄집어낸다든지, 우리가 따라해 본다든지, 뭐에 도전한다든지… 유재석 씨한테 3~4일 전에 컨펌해 봤는데 기획안 보냈다 까였다. (기자 : 진짜로요? 어떻게 닿으셨어요?) 사무실로 보냈다. (웃음) 연예인 쪽으론 안 되겠고 일반인 상대로 해야 될 것 같다”

한승곤 PD는 기획안이 ‘까인’ 이유에 대해 “아마 김태호 PD의 경쟁자가 될 것 같아서”라는 답을 내놨다. 죽이 척척 맞는다. 당장 만들 건 아니지만 시도해 보고 싶은 패러디도 있다고 고백했다. “셜록! (김문석 기자가) 키가 크고 비슷하니까. 한 번 해보려고 생각하고 있다”

김문석 기자는 ‘재능기부’로 만들어진 <예능의 신> 로고도 보여주었다. 디자인팀 성덕환 님의 재능기부라는 설명이 뒤따랐다. 진짜로 ‘리얼한’ 국제 에미상 한국인 첫 수상 페이지도 편집부 후배의 '따뜻한 손길' 덕분에 만들어졌다. 김문석 기자는 “대장만 뽑아달라고 했는데 실제 지면으로 뽑아줬다”며 “비디오 나가면 누군가 인터뷰하러 온다고 생각했다. 그때를 대비해서 이렇게 만들지 않았나 싶다”고 말했다. 2회부터는 우측 상단에 있던 KHBS(Kyung Hyang Broadcasting System)를 ‘경향TV’로 하기로 ‘혼자’ 결정했다고도 했다. ‘아무래도 영문약칭보다는 경향신문하고 더 연관성 있어 보이기 때문에’가 그 이유다.

“하나의 결과물이 나오고, 잘 만들었든 못 만들었든 <경향신문>이라는 공식채널을 통해 나가니까 책임감이 생겼다. 뿌듯함도 있다. 엄청난 작품은 아니지만, 신문사에서 하지 않았던 부분인데 내가 어떤 걸 했다는 느낌? 거창하게 말하면 ‘신세계를 열었다’! 내 스스로는 그렇게 느꼈다. 스스로도 업(UP)된 기분이다. 제가 원래 새로운 걸 잘 한다. 열정이 솟아나면 뭘 만들려고 한다. 한 번 할 때 확 하고. 누군가 받쳐주기만 하면 계속 할 수 있다”

▲ 인터뷰와는 아무 상관도 없고 촬영 일정이 바로 뒤에 잡힌 것도 아니었는데 '굳이' 들고 온 카메라. 기자는 이 상황이 웃겨서 사진 한 장 찍자고 요청했고 한승곤 PD는 능숙하게 카메라를 잡더니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미디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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