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연구자는 일반인들 혹은 다른 좌파 지식인들의 많은 오해와 의심 속에서 살아왔다. 진지한 연구주제로 보기에 대중문화는 너무 가볍거나 (특히 정치, 경제에 비하면) 부차적인 것처럼 생각된다. 스튜어트 홀은 이러한 오해와 의심에 맞서 “문화는 정치적이다”는 명제를 증명하는 삶을 살았다. 그러나 스튜어트 홀의 문화연구와 유사 문화연구들에 대한 비판은 제대로 구별되지 않았다. 특히, 1990년대부터 등장했던 한국의 ‘문화연구’는 스튜어트 홀을 단지 텍스트로만 받아들인 경향이 있다. 제도화되고 유행되었던 유사 문화연구들과의 차이는 구분되어야 한다. 스튜어트 홀 사후에 우리가 다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문화연구’에 바친 그의 헌신과 그의 관점 및 태도일 것이다.

“결국 문화연구는 내가(스튜어트 홀) 레이몬드 윌리엄스Raymond Williams를 처음 만났던 그 때 어디선가, 혹은 내가 리처드 호가트Richard Hoggart와 눈짓을 교환할 때 그 속에서 출현한 것이 아닐까? … 그것은 이미 다 자란 채로 출현했다. 나는 정말 과거를 이야기하길 원하지만, 결코 그런 방식으로는 아니다. ”

1950년 홀과 전통적인 문화주의자들의 만남 속에서 영국의 대중문화가 시작되었다면, 1990년 한국의 문화연구는 스튜어트 홀과 현대문화연구센터(CCCS)를 알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두 시기에는 대중문화가 이전 시기에 비해 폭발적인 관심 대상이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경제호황을 맞은 영국과 본격적인 소비사회로 진입한 한국의 시간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대중은 문화를 적극적으로 소비하고 향유하였다. 이러한 ‘대중문화’를 전통적 좌파들은 자본주의의 폐해로 단순하게 접근하며 못마땅해했다. 그들에게 대중은 우매한 대상이었고, 문화는 좋은 문화와 나쁜 문화로 구분지어졌다. 좋은 문화(민중 문화 등)는 대중을 선동하는 도구로 활용하고, 나쁜 문화는 민중을 현혹하는 기제에서 거부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그들에게 ‘문화’란 도구 혹은 질병이었다. 하지만 스튜어트 홀은 대중문화를 단순히 긍정하거나 비판하지 않고, 지배집단과 하위문화 집단 간의 일상적인 헤게모니 투쟁이 일어나는 장소로서 생각하였다.

“‘대중’이란 용어는 ‘문화'라는 용어만큼이나 많은 문제를 일으키는데, 이 둘이 결합하면 어려움은 거의 끔찍한 수준이 된다”

그가 생각하기에 문화는 사회변화가 가장 드라마틱한 방식으로 드러나는 곳이자 이데올로기 영역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문화를 진지하게 바라보면서 현재의 대중문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미래에는 무엇을 의미할 수 있을지를 놓고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한국의 유사 문화연구는 이런 홀의 입장을 ‘비평적 언어’로 단순화하였다. 이들은 90년대 동시대에 유행한 포스트모더니즘과 함께 문화연구를 문화비평으로 대체시키고 자신의 문화적 취향을 드러내었다. 이들은 그러나 대중과 문화의 다양한 혹은 모순적인 속성을 들여다 보려하지 않았고, 결정되지 않는 권력관계들이 서로 타협되거나 시험되는 지점 또한 살펴보려 하지 않았다. 대중문화는 홀의 표현에 의하면 악센트를 부여하는 것이고 여기에는 하나의 악센트가 아니라 다양한 악센트(multi-accentuality)가 존재한다. 이는 대중문화가 무조건 긍정적이란 이야기는 아니다. 그는 오히려 대중문화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계급들과 개인들을 대중적 힘으로 구성할 수 있는 역량”이 생겨난다고 믿었으며 하지만 이러한 기대는 늘 배반당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대중문화 속에는 항상 (늘 새롭게) 확보되어야 하는 입장들이 생겨나고, 이는 시대적으로 변화무쌍하게 달라지게 된다. 단일하거나 초역사적인 이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는’ “불투명한" 대중과 문화의 상황에서 문화연구자들의 태도는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대중문화’를 진지하게 바라보아야 한다는 관점 그 자체이다.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의 긴박함 앞에서, 문화연구의 목적은 도대체 무엇인가?"

▲ 책, Understanding Stuart Hall. 헬렌 데이비스(Helen Davis)가 2004년 쓴 책이다. 이 책 서문에서 헬렌 데이비스는 문화연구에 있어서 가장 영향력이 크고 가장 결정적인 기여하는 사람이 스튜어트 홀이라고 말했다.
문화를 경제적 조건의 부차적 반영으로 환원시킨 마르크스의 ‘토대-상부구조’의 논리를 극복하고 경제결정론자들과 끊임없이 논쟁하는 것은 문화연구자의 숙명이다. 홀의 유명한 논문 “문화 연구 : 두 개의 패러다임”은 문화주의와 구조주의를 끊임없이 비교하면서 그 대안을 모색한다. 문화주의는 대중의 살아있는 경험을 중시하긴 하나, 정치적 투쟁을 관념화, 단순화 또는 낭만화하기도 한다. 구조주의자들은 이데올로기를 중시하지만 또한 그 자체에 매몰되었다. 특히 홀은 자신이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구조주의자 알튀세르를 분석하면서, 체계와 구조에 지나치게 큰 비중을 둔 나머지 대중의 잠재력을 무시하게 된다고 비판했다. 결국 이러한 불충분한 입장들을 대신해 내놓은 홀의 제안은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였다. 그람시의 작업은 문화주의와 구조주의의 한계를 폭로하며 이 둘을 절합(articulation)하는 수단이다. 절합은 홀의 독특한 용어인데, ‘분명하게 표현한다”는 뜻과 함께 상이한 요소들을 하나의 통합체로 만드는 개념이다. 홀은 그람시를 통해 구조주의와 문화주의를 절합하고 문화연구의 추상성, 형식주의, 비역사성을 피해 현재의 국면적(conjunctural)인 특수성을 강조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홀에게 그람시는 유기적 지식인으로서 (이후 더욱 자세히 언급하게 될) CCCS 활동을 지속할 수 있도록 결정적인 인물이다.

다시 돌아와서 스튜어트 홀을 수입하였던 많은 한국의 문화연구(자)는 홀이 제안한 대중문화에 대한 관점과 태도를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였을까? 어떤 이들은 대중문화에 대한 실천적 연구를 지향하기보다 제도화 된 대학으로 들어가길 선호하였다. 또는 편견과 같은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는 문화비평가가 되었다. 한국의 선배문화연구자들은 대중들의 곁에 있기보다는 학자로서 또는 장사꾼으로 살아갔다. 2000년 이후 신자유주의 체제가 도래하며 새로운 경제결정론에 대한 문화연구는 점점 무기력해졌다.

어쩌면 글로 배운 한국의 많은 문화연구자들에게 스튜어트 홀은 여전히 과거의 텍스트로 남아있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가 홀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텍스트를 넘어선 그의 태도이고, 문화연구에 대한 진지한 질문과 실천 때문이다. 도대체 지금 한국의 그 많던 문화연구(자)는 지금 누구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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