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면 귀신도 부린다’는 중국 속담처럼 자본은 모든 걸 잠식하고 모든 가치관의 맨 윗자리에 오르기를 바라는 속성이 있다. 주인공 남건은 한때는 이데올로기가 최고인 줄로만 알던 노동운동가를 한 전력이 있는 남자다. 하지만 이데올로기가 밥을 먹여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찍 깨닫고는, 메피스토에게 영혼을 팔아치운 파우스트 마냥 자본을 추구하기 위해 자본이라는 가치관을 이데올로기의 자리와 맞바꾼다. 노동 운동을 함께한 전상국과의 옛 우정은 돈 이천만 원을 빌려달라는 선배 전상국의 부탁 앞에서 산산조각난다.
이는 남건이 자본주의적 가치관을 노동운동을 함께했다는 동지애와 맞바꾼 결과에서 비롯된다. 남건이란 캐릭터는 돈에 경도된 인물이면서, 성인 연극 기획자다. <헤르메스>는 성인 연극 기획자라는 남건의 캐릭터 때문에 자칫 19금 외설 연극으로 보이기 쉽다. 하지만 연극은 되레 외설 연극을 풍자하고 있다.
실제 모 외설 연극에 출연한 여배우의 남동생이, 누나가 외설 연극에 출연하는 배우인 줄 모르고 외설 연극을 찾았다가 누나가 벗는 모습에 경악을 하고는 불같이 화를 내며 공연장을 떠난 적이 있다고 한다. <헤르메스>는 이를 영리하게 비꼰다. 극 중에서 누나가 벗는 모습을 보고 경악을 하는 게 아니라 자살을 하는 소심한 남동생의 설정으로, 실제 외설 연극을 공연하다 벌어진 여배우의 남동생 해프닝을 비꼬고 풍자한다.
그럼에도 <헤르메스>는 돈으로 승승장구하는 남건의 자본주의 성공기에만 안착하지 않는다. 반대로 자본주의에서 승자로 살아남는 데에는 성공하지만, 영혼에는 생채기를 입는 가련한 인간 군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남건이 여성 안마사와 성미에게 대소변을 자기 몸에 싸달라고 요청하는 건 분비물 페티시로 보일 법하다. 하지만 이는 돈을 추구하느라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는 남건 자신을 대소변과 동일시하는 자기 학대다.
한 달에 9천만 원 가까운 거액을 벌지만 남건의 주위 사람들 모두 돈으로 말미암아 나락으로 떨어지는 설정 역시 남건뿐만 아니라 극에 등장하는 모든 이들이 돈에서 자유롭지 못함과 동시에 자본으로부터 생채기를 입는 가련한 이들임을 보여준다. ‘기브 앤 테이크’처럼 돈을 벌면 다른 중요한 걸 잃을 수 있다는 걸 외설 연극 제작자라는 설정을 빌어 관객에게 보여준다.
그 중에서 단 한 명, 유가인을 대신해서 성인 연극에 뛰어드는 김성미는 다른 여타 캐릭터와는 달리 자본의 생채기에서 자유로운 인물이다. 영혼의 구원을 바라는 남건에게 한 줄기 빛 같은 존재는 여성 안마사 유정숙이다. 남건은 고립된 인물이다. 남건은 물신주의로 말미암아 인간관계가 고립되고 단절된 남자다. 이런 남건에게 유정숙은 눈이 보이지 않음에도 남건으로 하여금 광장의 촛불 집회에 관심이 가도록 이끄는 인물이다.
남건 혼자만을 위해 살아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주위를 돌아보며 살라는 선각자적 메시지를 던지는 이가 유정숙이다. 여성 안마사가 자본주의에 천착한 남자의 영혼을 정화하고 예전의 정체성인 집단으로 소환한다. 돈에 찌든 한 남자의 영혼을 건사하는 건 자본주의적인 관점으로 볼 때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여성 안마사 덕분이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