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이 정치에 휘둘리고 있다.” KBS 유재천 이사장의 말이다. 2003년 7월 6일자 <동아일보> ‘월요포럼’을 시작하며 ‘화두’로 꺼낸 말이다. “국영방송 시대도, 군사독재정권 시대도 아닌 민주정부 아래서 방송이 정치바람에 따라 이러 저리 심하게 흔들리고 있기 때문”에 한 말씀 하신 모양이다. “대통령이 이른바 자신과 ‘코드’가 맞는 사람을 사장으로 임명하는 한 방송이 정치적으로 독립성을 견지할 수 없다”고도 했다. 자신이 밝힌 원칙에 기초해 볼 때, 지금의 처신은 어떻게 정당화 될 수 있는가? 진정 정치에 휘둘리지 않는 방송을 위한 길이라 하겠는가? 정 사장의 문제는 이제 법정에서 시시비비 가려질 것이다. 동시에 유 이사장에 대한 평가 또한 무엇보다 바로 자신이 내뱉은 말에 기반 해 우선 내려져야 하지 않을까? 후학으로서 결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짚지 않을 수 없다.

유 이사장은 같은 해 11월의 같은 칼럼에서도 공영방송의 핵심 원칙으로 독립성, 공정성을 강조한 바 있다. “노무현 정부 하의 KBS가 탈정치적 입장을 견지하면서 독립성과 공정성을 지켜 왔다고 말할 수 있는지를 KBS 구성원들은 진솔하게 반성해 보아야 한다”고 충고했다. 그게 ‘공영 KBS가 사는 길’이란다. 공발연에 몸담은 보수 언론학자로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이야기다. “공영방송의 독립성과 공정성을 보장할 수 있는 근본대책을 심도 있게 연구해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원려(遠慮)가 필요하다”고 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러면서 의아하다. 대체 그 ‘원려’는 어디 갔는가? 혹 작금의 행태들이 바로 그 ‘원려’에서 비롯된 것인가? 오히려 급한 단견, 일정에 쫒기는 정치 공학적 프로그램처럼 보이는 것은 무엇인가? 인내심을 갖고 좀 더 읽어 내려가 보자.

▲ 지지난달 임시이사회 장으로 입장하는 유재천 KBS 이사장ⓒ미디어스

유 이사장, 대체 그 원려는 어디 갔는가?

<국민일보>에 남긴 2004년 7월 29일자 유 이사장 ‘여의도 포럼’의 제목은 역설적이게도 ‘정치에 예속된 방송’이다. 지금의 KBS에 더 적합한 표현이 아닌가? 정 사장 축출의 날을 ‘정치로부터 해방된 참된 공영방송 회복의 날’로 기념할 자 누구인가? 칼럼에서 유 이사장은 당시 방송위원들이 “어떠한 정파적 이해관계나 이익집단들의 영향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게 독립성을 지녀야 된다”고 했다. “정당의 추천을 받는다는 것은 정파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라는 의미가 아니다”라는 당위는 KBS 이사들에게도 똑 같이 적용되는 게 아닌가? 2008년 현재 과연 KBS 이사장과 이사들은 “한국의 방송이 공공성ㆍ공정성 및 공익을 실현하도록 독립적인 위치에서 직무를 수행하라는 엄숙한 책무를 위임받았다는 인식”에 얼마나 투철했는가? 이 명백한 이중 잣대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같은 해 같은 신문 같은 지면의 다른 글을 읽어본다. 이른바 ‘탄핵’보도 연구보고서를 둘러싼 논란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기본적인 주장은 이렇다. “자신들의 주의 주장만 옳고 그와 다른 의견은 오류로 매도하는 풍토가 고착되어 간다는 것은 다양한 의견의 충돌로 올바른 여론이 형성되는 민주주의 제도의 근본을 부정하는 행위”로서 “전체주의의 등장과 다를 바 없는 상황을 만들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에 크게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수의 이름으로 소수를 압제하고 침묵을 강요하는 풍토야 말로 더 무서운 민주주의의 적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신자유주의 경찰국가 시대에 이 보다 더 맞아 떨어지는 교훈이 어디 있겠는가? 바로 그 민주정치의 상식에 기초해 먼저 반성할 일이다. 지금의 ‘풍토’ 병을 자진하고 있지는 않은지 뒤돌아보시라는, 인간에 대한 신뢰를 참살하는 시대의 고언이다.

삭발하신 박승규 KBS 노조위원장에게도 똑 같이 못된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해 왔던 말과 약속에 기초해 스스로의 행동을 되짚어 보시라. 뭐라고 해 왔던가? 정연주 사장에 대해서는 생각의 차이를 인정해 달라고 하지 않았던가? 정 사장 문제가 외부권력에 의해 비정상적이고 반상식적인 방식으로 처리된 지금부터는 공언했던 대로 행동에 나서야 하는 게 맞지 않은가? 그런데 왜 아무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가? ‘공영방송 KBS사수 사원행동’의 분주함만이 눈에 뜨일 따름이다. 내부의 분열 때문에 힘들다? 전국언론노조와의 불화 때문에 어렵다? 위원장이 제명 징계된 상태에서, 구조적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KBS 앞에 걸려 있는 커다란 걸개들은 다 무엇이라는 말인가? 아무런 행동도 따르지 않는, 말풍선에 불과하다는 말인가?

KBS노조, 신뢰 회복과 정당성 복구가 지금의 할 일

어제 박승규 KBS 노조위원장은 특보를 통해 “우리는 KBS의 미래를 위해 지금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오히려 반문했다. 더 이상 과거에 집착하지 말자고 했고, 미래를 이야기하자고 했다. 맞는 말이다. “KBS의 운명을 결정할 중요한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차기 사장 문제는 그 일부일 뿐이다. 핵심은 이 다음부터다. 사원행동에 대해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일치단결”하자고 했다. 아울러 “우리에게 맞는 옷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굴하게 언론노조에 붙어 있을 때가 아니라” 우리끼리 강력하고 효율적인 ‘공영방송노조’를 건설해야 한다는 논리다. 물어본다. 과연 이게 “내부의 갈등을 극복하고” 한 걸음 전진하는 바른 길인가? 강력한 독립노조의 건설이 조합원 생존권 사수의 조건인가? 정말 바른 판단이며, 이에 기초한 KBS 사수와 공영방송 수호의 투쟁은 과연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

▲ KBS노동조합 명의의 걸게그림 등이 본관에 걸려있다ⓒ미디어스
그래도 KBS노조의 진심을 믿고자 했던 입장에서, 그래서 나름 대화의 선을 대보고자 했던 처지에서, 이제 마지막 고언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KBS노조를 살리고, KBS를 살리고, 무엇보다 궁극적으로 공영방송과 민주사회를 살리기 위해서다. 단호한 충고, 분명한 제안이다. 원칙과 명분, 대세를 따르라. 그에 따라 ‘독립방송노조’의 구상을 접고, KBS독립의 연대행동을 시작하라. KBS 수호의 깃발을 들고 나서고, 공영방송 사수의 싸움에 앞장섬으로써 일치단결한 중심점의 자격을 득하는 것이다. 공동투쟁의 과정 속에서 KBS ‘사원행동’ 및 제 단체들과 이견을 풀고자 노력하라. 행동하면서 대화하라. 동시에 외부 시민사회와의 네트워크에 깊이 가담하라. 동참함으로써 신뢰를 회복하고 활동함으로써 정당성을 복구하는 게 지금의 할 일이다. 언론노조 탈퇴와 ‘독립노조 건설’은 이를 위반한 잘못된 선택이다.

KBS노조 박승규 위원장에게 제안한다. 통 큰 정치력, 과감한 판단력을 발휘하여 언론노조 탈퇴 투표를 중지하라. 그게 어려우면, 사태 해결 시까지 잠정적으로 유보하라. 이와 함께 KBS 기자협회, PD연합회, 그리고 이미 출범한 ‘KBS 사원행동’등과 ‘KBS 사수, 공영방송 수호’의 공통원칙에 따라 지금 당장 대화에 나서라. 그리하여 서둘러 더 큰 'KBS 사수 노조 사원 행동‘을 구성하라. 타 조직 단체들도 KBS노조와의 대화 타협에 진정성을 갖고 임할 것이며 지금까지가 아닌 지금부터의 노선을 고민할 것이다. 이와 함께 KBS노조는 현 상황에 대한 입장과 향후 구체적 계획을 분명하게 시청자, 시민들에게 밝혀야 한다. 이 입장 표명에는 앞서 밝힌 ’KBS 사수, 공영방송 수호‘의 원칙과 계획, 프로그램이 분명하게 적시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노조독립이 아닌, KBS독립이 핵심임을 정확하게 천명하고, 그런 사회의 기대와 시대의 요구에 충실할 것을 약속해야 한다.

정상의 길 발견을 위한 비상한 판단, 단호한 결심을 요구한다

‘미디어행동’을 비롯한 시민사회와의 연대, 교통이 비로소 가능해 질 것이다. KBS노조는 내부 구성원들과 일반 대중의 신뢰를 조금씩 회복해 갈 수 있을 것이며, KBS와 공영방송의 연대투쟁은 그럼으로써 크게 탄력을 받을 것이다. ‘KBS 내부의 문제’가 미디어 공공성 투쟁의 걸림돌이 되는 일이 더 이상 없어야 할 것이다. 누구의 탓 혹은 오해이든 관계없이, 노조의 문제가 지금과 같이 계속해 방해의 요소로 남는다면, 그 역사적 책임을 결코 면치 못할 것이다. 영원히 역사적 죄인으로 남을 것이며, 역사적 과오를 이후 절대로 청산할 수 없을 것이다. 이후는 없다. 지금 당장 행동에 나섬으로써 KBS 독립과 공영방송 수호의 미래가 가능할 것이며, 그 주체적 책임을 KBS 노조와 구성원들이 짊어져야 한다. 이사회의 비정상적 노선에 대적할, 정상의 길 발견을 위한 비상한 판단, 단호한 결심을 요구한다.

KBS는 정 사장이 아니다. 더욱이 KBS는 이사장과 이사회의 것도 아니며, 정권의 전유물도 결코 될 수 없다. KBS는 구성원들이나 노동조합이 감히 내 것이라 떠들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모두 시청자와 ‘국민’, 인 민 대중의 넓고 다양하며 고른 이익을 위해 대리 위임 관리 집행의 역할을 떠맡았을 따름이다. 그 서비스에 대한 평가는 노조나 이사회는커녕 검찰, 청와대, 방통위 조차 감히 내릴 수 없다. 오직 단 하나의 주권자, 시청자 시민들만이 냉정하고 정확하게 판정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역사를 봐도 그러하다. 그러하니 제대로 처신하시길. 무대 위에 있다고 자칫 자기가 주인공이라 착각하다가는 참 주인들에 의해 심히 봉변당할 것임을 경고한다. 사장 구축 이후 KBS에 남은 이사장과 노조위원장에게 전하는 시중의 흉흉한 이야기다. 개인적으로 불편하지만, 참혹한 사회가 메신저 역할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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